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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수필 5 그리스도의 종로서의 생명살이
이 글에서 내가 두 번째로 글 제목의 하나로 등장시킨 ‘생명살이’란 말을 처음 듣는 이들에겐 생소하게 느껴질 수도 있기에 ‘머슴살이’, 곧 종살이란 말을 나란히 등장시켜 삶을 ‘살이’라는 말로 대체에 사용했다. 옛날엔 머슴살이란 말이 상식적인 말이었으니 생명살이란 말도 괜찮겠지 싶어 기회가 있으면 계속 사용해 보려고 한다. 물론 그래도 생소해 보이는 게 사실이긴 하지만,
사실은 머슴살이란 말도 1950년에 한국 전쟁이 일어나 서울에서 남쪽 어느 시골로 내려가서 피난살이를 했기 때문에 그 당시엔 시골에서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하는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함께 지낸 적도 있고, 더구나 머슴살이란 말이 옛날엔 어느 곳에서든 들을 수 있는 상식적인 말이었기에 별생각 없이 사용한 것이지만, 지금은 아마도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으니 일상에서 사라진 말이 돼버린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머슴살이란 말을 다시 들추어 글을 쓰려는 것이 본래의 의도가 아니라, 생명을 가진 수많은 생명체이든 보다 특별한 창조주의 형상을 지신 사람이든 모두 각각 다른 생명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생명체의 종류에 따라서 각각 다른 ‘생명살이’를 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생명살이’란 용어를 사용했을 뿐이다. 애당초 창조주께서 풀이든, 나무든, 벼나 보리든, 새들이든 짐승들이든 각각 ‘종류대로’ 각각 다르게 지으셨다고 밝혀놓으셨기(창1장)에 각각 종류가 다른 것들의 ‘생명살이’가 다를 수밖에 없다. 모든 ‘생명살이’엔 각각의 특징이 있다는 건 서로 다른 종류대로 ‘생명살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본인이 어떤 특별한 지식을 연구해서 가진 지식으로 접근한 것이 아니라, 외형적인 모습에서 발견한 모습들을 통해 더욱 깊은 혹은 신기한 ‘생명살이’의 모습을 보며, 거기서 교훈을 얻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글 제목에 등장한 ‘머슴살이’에서 머슴은 단순히 신분 표시였고, 자신의 신분에 맞는 삶을 머슴살이로 표시했다. 머슴은 자기 몫의 땅을 갖지 못했기에 땅을 가진 지주(地主)의 집에서 벼 몇 섬을 연봉으로 계약하고 일하는 일꾼이었다. 그리고 계약 기간이 끝나면, 다른 집으로 옮길 수 있고, 다른 일을 찾아 머슴살이를 중단할 수 있는 자유인이었다. 애당초 부잣집에 노예가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몸종과는 전혀 다른 신분이었다. 한국 전쟁 중에 피난 가서 살게 된 어느 시골에서 머슴살이도 보았고 부잣집의 몸종살이도 바로 옆에서 마주치며 살았다. 몸종은 동네 사람들과 말을 섞는 일도 보지 못했다. 그런데 그의 아들도 자기 아버지처럼 부잣집을 떠나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나와는 친구처럼 지냈지만, 그는 아버지 곁을 떠나지 못하고 살았다.
바울은 당당히 그리스도의 종(從)이라 고백했다(롬1:1). 당시에 로마인들에게 익숙한 노예란 뜻이다. 당시 로마제국에선 부끄러운 신분이었을지라도, 주님에게서 결코 떠날 수 없는 자신의 신분을 종, 곧 노예라고 고백한 바울을 보면, 주님의 죽음으로 구원받은 크리스천 모두의 새로운 신분임을 알고 자랑스럽게 살아야 할 종이 아닌가? 편지를 쓸 때마다 밝힌 바울의 사도권 주장도 그리스도를 위한 자랑스러운 종살이 신분의 고백이라면, 오직 그리스도 한 분께만 붙잡힌 자랑스러운 종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