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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477): 하나님, 그 말씀의 본질을 찾아서 21
평범한 말의 깊이와 독특성-‘창조하다(create).’ (3)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created)(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라는 선언은 성경에 기록된 첫 번째 짧은 한 구절로, 성경기록자의 첫 선언이요, 창조주 하나님의 첫 등장이다. 이어서 창1:27절에선 하나님의 인간 창조에 관한 선언이 있고, 창6:7절에선 ‘주님께서 (인간 창조를) 탄식하셨다.’라는 말씀에 이어 “내가 창조한 것이지만”, (사람을 이 땅 위에서 쓸어버리겠다)고 말씀하신 후 짐승과 땅 위를 기어 다니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사람의 타락과 연결돼 모두 저주 아래 놓이게 된 사실을 밝히고 있다. “그것들을 창조하신 것이 후회되는구나.”라는 창조주의 심중 토로를 들으며 우리 인간의 비극적 현실도 함께 체험하게 된다. 창조주의 이 후회는 창조주의 첫 창조를 새롭게 대신할 다른 어떤 존재가 없다는 의미에서 최악의 비극적 선언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사실 ‘창조하다.’라는 창조주의 행동 선언은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이 최초로 시행하신 유일한 동사이다. 피조물 중에선 누구의 입에도 담을 수 없는 유일한 첫 언어이다. ‘창조하다.’라는 동사의 주어는 창조주 하나님 외에 그 동사의 주어가 될 수 있는 다른 존재는 없다. 소설 창작, 시 창작, 이런저런 문화 예술 작품에 창작자란 타이틀을 붙이긴 해도 실제로 사람들의 그 어떤 창작 행위를 창조주의 창조작업의 옆자리에 놓을 수는 없다. 다만 기존의 어떤 재료를 사용해 자신의 아이디어로 필요한 것을 제작한 것이기에 창조주의 ‘창조하다.’라는 동사와는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 다만 그들의 작업은 이미 존재하는 어떤 것을 이용했을 뿐이다.
심지어 에덴동산에 거주하던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다음에 자신들의 몸의 다름을 알고 두려워 나뭇잎으로 자신들 서로의 다름을 가렸던 그들의 최초의 행위조차 창조가 아니고, 창작도 아니었다. 더구나 그들을 에덴의 동편으로 쫓아내시면서 그들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건 하나님의 긍휼의 행위일 뿐, 창조행위는 아니다. 아무것도 없는 데서 있게 하신 하나님의 창조와는 다른 행위란 뜻이다. 창조주께서 친히 지으신 짐승의 가죽으로 아담 부부의 옷을 만들어 입히셨다면, 하나님의 디자인과 만들어 입히신 가죽옷조차 창작품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 지어 입히신 제작의 의미라는 말이다. 따라서 인간의 그 어떤 최초의 행위일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작업에 비교될 수는 없다. 창조를 부정하려는 진화론의 시도는 그 전후에 아무것도 존재치 않았음을 밝히신 ‘태초에’ 행하신 하나님의 창조를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인간의 언어 사용인 가정법(假定法)에 불과하다. 가정법은 진실을 부정하려는 인간의 거짓된 상상적 언어 표현의 일종일 뿐이다. 하나님이 피조물인 인간에게 창조 혹은 창작 행위는 존재치 않는다. 인간의 그 어떤 행위도, 언어도 그 안에 창작 행위는 모방이다. 언어 한 마디, 그 어떤 작품 행위에도 창작은 없다. 그저 남의 것, 혹은 기존의 것의 일부 혹은 전부를 카피하면서도 거짓을 감추려는 속임수도 존재한다. 나의 존재 자체가 모두 얻은 선물인데, 장성하면서 갖게 된 그 어떤 것이 내 창작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