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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맞으러 가는 길 3 부활절 축제를 향한 기쁨의 여정 3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슬픔을 당한 죽은 나사로의 집을 방문하셔서 이미 죽은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를 만나 주님 자신의 정체성을 먼저 밝히신 다음에 물으신 질문이
바로 “네가 이것을 믿느냐?”이다.
’나는 살아날 거야, 나는 살고 있어‘,라고 동사로 말할 사람은 있을 수 있지만, 부활과 생명이란 명사를 나신의 정체성으로 밝히신 주님의 표현과는 전혀 다르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알기 쉽게 말하면, 우리 중에 누가 주께서 하신 말씀처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이렇게 못 박아 말할 사람은 있을 수 없다.
어느 누가 감히 주님의 선언처럼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선언할 사람이 과연 있을까? 주님의 말씀은 대화가 아니라, 자기 개인의 정체성, 혹은 존재의 선언이다. 다시 강조하면 ’부활과 생명‘이 바로 주님의 영원성이요, 존재 자체라는 선언이다. 다시 말하면 ’나는 부활의 주인이요, 생명의 주인이란 선언이다.‘
우리 중 누구도 주님의 그 말씀을 따라 흉내 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동사로 표현하는 것과 명사로 자신을 표현하는 것은 전혀 다른 뜻이다. 요한일서에서 ’하나님은 사랑이다.’라는 표현을 따라 선언할 사람은 없다. 사랑의 주인이신 하나님처럼 사랑을 행사할 자는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주님께선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시기 전에 이미 부활을 선언해 놓으셨기에 죽은 나사로 살리실 수가 있으셨고, 회당장 야이로의 딸도 살리셨다. 부활의 주인이요 생명의 주인이신데 부활로 죽은 자를 일으키지도, 생명을 불어넣어 살리지 못하시면, 주님의 선언은 신빙성이 유지되지 못한다.
주님께서 마르다에게 “네 오라버니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고 미리 선언하신(요11:23) 다음에 그를 살리신 사실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동 원리의 실천이다. 주님께선 미리 선언하시거나
미리 약속하신 것을 이루신다.
하지만, 우리 주님의 약속을 따라서 믿고 사는 삶이라면, 누구든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마11:28-30)”는 주님의 그 초청에 당연히 응해야 하고, 내가 맨 멍에도 아시고, 그 짐의 무거움 때문에 쉼이 필요한 것도 아시는 주님의 초청이다. 이것이 우리의 순종으로 이어져야 할 삶이다. 주님께 다가가 누리는 쉼보다 더 급한 건 주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는 순종이다. 내가 내 힘으로 살아가기 위해 짊어진 무겁고 피곤한 짐이 아니라, 주님의 짐, 곧 편안하고,
가벼운 짐을 지라고 말씀하신 것. 죽은 자에게 짐을 맡기실 분이 아니다.
갈보리 산에서 주님이 지신 십자가 옆에서 그가 죽음 직전에 받은 주님의 약속을 따라 낙원에 들어간 그 강도처럼 그가 무거운 죗짐을 지고 죽임을 당했지만,
그의 마지막 삶은 주님과 더불어 낙원행, 곧 천국 길을 따라나선 복된 삶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