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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87): 가슴에 품은 꽃이 열매가 된 나무 이야기
나는 아내와 이웃 글렌뷰에 있는 작은 공원을 자주 거닐지만 오늘은 아주 신기한 화초를 발견했다. 생김새의 겉모습 자체는 어디서든 쉽게 볼 수 있는 것들이라서 그 동안 지나쳐버린 화초인데(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른다), 오직 풍성하고 진한 초록의 잎들만을 내세워도 넉넉히 사람들의 눈길과 사랑을 받기에 충분한 화초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뜻밖에 흰 색깔의 아주 작은 꽃 몇 송이가 어렵게 고개를 내민 듯 어느 순간에 내 눈에 들어왔다. 꽃들은 대개 잎보다 자신의 꽃대를 높이 세워 울긋불긋 아름다운 모습을 자랑스레 드러내기 마련인데, 이 화초는 커다란 잎들이 위에서 우산 쓰듯 공중에 펼쳐져 있어 밑 부분이 잘 보이지 않았는데. 아주 작고 하얀 꽃들이 잎의 아랫부분인 잎줄기를 타고 가지런히 피어난 흰 꽃들이 아래쪽을 향해 보기 좋게 줄지어 달려 있었다. 그 꽃들이 커다란 잎을 자랑스레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잎들이 꽃들을 아끼느라 커다란 잎을 우산처럼 펼쳐서 자기 꽃들을 숨겨놓은 것일까? 진정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 무성하고 커다란 잎들이 이상하게 작은 꽃들을 숨기고 있는 화초 이야기이다. 하지만, 사실은 가슴에 꽃을 품어 꽃 자체를 열매로 만들어 살아가는 무화과나무의 생애보다 더 신기한 이야기는 없을 것이다. 물론 꽃은 열매 혹은 씨앗을 위해서 피고지지만, 꽃 자체가 열매가 되는 것이 훨씬 더 쉬운 일인지 모른다. 진달래꽃을 입에 넣고 씹는 것보다야 아예 처음부터 꽃으로 달콤한 열매를 만든 무화과나무의 생애가 훨씬 더 보람되지 않을까 싶다.
여기서 성서의 무화과나무 이야기를 듣는 건 아주 자연스럽다. 이스라엘을 방문했을 적에 요단강의 발원지인 가이사랴 빌립보와 헤르몬 산의 밑자락인 비옥한 땅 바산 지역과 골란 고원에서 엄청 커다란 소들을 보면서 ‘바산의 암소들’(암4:1)이 생각났고, 크고 싱싱한 무화과나무를 보면서 왜 하나님께선 이스라엘의 상징으로 무화과나무를 지칭하셨을까 생각해 보았다(호9:10;렘24:3-6).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눈이 밝아져 자신들이 벗은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벗은 몸을 가린 최초의 옷이었던 사실은 무한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그들이 벗었다는 말 자체가 실제론 그들이 옷을 입은 적이 없었기에 단지 상식적으로 지나칠 말이 아니다. 혹시 육체의 벌거벗음이란 하나님 앞에서 영적 벌거벗음이 드러났다는 의미를 나타낸 것은 아닐지 궁금해졌다. 더구나 에덴동산에 있었던 무화과나무가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나무가 된 것은 지극히 합리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가슴 속에 꽃을 품고 살아가야 할 하나님의 사람들. 그 꽃이 달콤한 열매가 되어 그들에게 풍성한 삶을 영위케 한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무화과나무를 자라게 하신 것은 어쩌다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무화과나무 그 열매 속에 하나님의 뜻이 깊은 숨겨져 있었던 것 같다. 좋아하던 것이 사라져버리는 건 누구에게나 아픔이고, 슬픔이다. 이스라엘은 그 나라에서 풍성하고 달콤한 무화과나무가 많아서 무척 좋아했다. 무화과나무가 9개월 내지 10개월을 수확할 수 있을 만큼 풍성한 열매를 선물했기 때문이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무화과나무 열매가 풍성하다는 건(신8:8;사36:16), 그 나라가 잘되고 축복 받은 나라란 뜻이지만, 물론 다른 나무의 경우도 있지만, 그 중에서도 무화과나무 열매가 흉년이 들면 당연히 그 나라의 재앙일 수밖에 없었다(렘8:13;욜1:12). 그렇다면, 무화과나무의 풍성함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과연 무엇일까? 이 질문의 답은 매우 중요하다. 눈에 보이는 열매의 풍성함이 반드시 기쁨이요, 즐거움일 수 없다는 메시지로 받들어야 한다. 무엇이든 특히 물질적인 것들의 풍성함을 좋아하지만, 그런 모든 것들이 없는 경우에도 괜찮다거나 그런 재앙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올리브나무에 열매가 비록 없더라도 오직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했던 하박국선지를 바라보며(합3:17-19), 거기서 해답을 찾으려 애쓰는 삶이 참된 믿음의 여정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