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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40): 바울이 강조한 크리스천의 정체성
내가 미국에 온 후에 너무 많이 들어서 잊히지 않는 낯선 용어중의 하나가 ‘한국인의 정체성’ 강조가 아니었나 싶다. 물론 한국을 떠나 낯선 나라 미국 땅에 살면서 고국이 그리울 때면 민족이나 고국의 정체성을 강조해서 외로움을 달래려는 숨은 뜻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물론 오랫동안 정든 고국을 떠나왔으니 그리움이 더더욱 진할 수도 있겠다 싶지만, 또 한 편으로는 나라 사랑하다가 신변에 위험을 느끼고 망명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자원해서 스스로 보따리를 싸서 이민 온 것인데 어째서 그토록 한국인의 정체성을 강조하며 마치 한국으로 되돌아가야 할 사람이 억지로, 혹은 마지못해 미국에 붙잡혀 살고 있는 듯 한국인의 정체성을 붙들고 자녀들에게까지 심어주려고 애를 썼는지 이해할 수 없는 면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물론 요즈음은 예전에 비해서 이민 오는 사람들이 적어서인지는 몰라도 한국인의 정체성의 강조가 조금은 시들해진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장 많이 강조한 주체가 한국인의 뿌리를 가진 사람들의 모임인 한인교회가 아니었나 싶고, 한글을 비롯해서 한국문화를 자녀들에게 가르치려는 부모들의 열심히 교회 안으로 그런 교육을 끌어들여서 교회가 마치 한국인의 정체성을 심어주는 요람이나 훈련장이 아니었나 싶다.
하지만 하나님의 교회는 국적 혹은 민족과 관련된 핏줄의 정체성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께 속한 자라는 믿음 혹은 영적 정체성에 민감한 영적 사람으로 키워주어야 할 책임을 통감해야 하지 않을까? 육적인 정체성 강조가 오히려 영적인 정체성을 밀어내면서 시간에 속한 육체적 정체성이 영원에 속한 영적 정체성을 가볍게 여기는 위험을 초래한다는 걸 왜 모르는가? 결국 하늘에 속한 크리스천의 영적 가치관이 육적인 세상 가치관에 함몰되면서 대내외적으로 혼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정체성의 강조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서 가치관이 달라지는 것이라면 크리스천의 정체성 강조보다 더 중요한 것이 따로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렇다. 부활의 주님께서 유대인 골수분자 바리새인 사울을 강제로 부르셔서 바울이란 이름으로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신 사실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가? 그는 이방 땅 어디를 가나 먼저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도 민족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과 그 복음 사랑이었고, 먼저 복음을 접한 유대인들을 통해 그들이 살고 있는 이방 땅에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되기를 바라는 주님 사랑에서 나온 충정이었다. 단순히 바울 자신의 민족사랑이 아니었다. 바울은 자신의 정체성을 자기 핏줄 자기 민족 유대인에게서 찾은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하나 되는 일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새 사람이 된다는 걸 설명하면서, ‘거기에는 그리스인과 유대인도, 할례 받은 자와 할례 받지 않은 자도, 야만인도 스구디아인도 종도 자유인도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골3:11).’라고 선언한 걸 보면 그의 선언이 바로 크리스천의 정체성의 강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바울은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받았을 때 유대인의 자존심이 아니라, 자신이 태어날 때 갖게 된 로마 시민권을 내세워 로마 황제에게 재판을 받겠다는 주장으로 유대인의 암살 음모와 그들의 정죄의 틀에서 벗어난 사실을 보더라도 그는 유대인의 정체성을 내세워 보호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붙들고 어디서든 누구에게든 오직 그리스도만을 전하려고 애쓰지 않았는가? 더 분명히 말하면 자신의 정체성, 곧 히브리인이라든지 혹은 바리새인의 정체성을 자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의 정체성을 내세워 오직 그리스도만을 전하며,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빌1;21).’ 이런 확실한 정체성을 지니고 그리스도를 살고 그리스도를 위해 죽지 않았는가?<우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