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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56): 예수 그리스도의 육성, 그 붉은 말씀의 묵상(2)
2. 두 가지 훈장(마3:15)
“지금은 그렇게 하도록 하십시오. 이렇게 하여, 우리가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옳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붉은 글씨로 표기한 성서를 읽으면서 특별히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내용이 돋보여 그 말씀을 묵상하며 글을 쓰려고 시작했지만, 이런 짧은 글로든 혹은 나의 글쓰기의 속도로는 언제 끝이 날지 가늠할 수가 없다. 그래도 살아 있는 한 계속해보려고 한다. 이번엔 세례 요한에게 건네신 그분의 붉은 말씀 한 마디를 자세히 살피려 한다.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평탄케 해서 하늘의 사역을 땅에서 감당케 하시려고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먼저 세상에 온 사람답게 그는 광야에서 이렇게 사자호를 발하고 있었다. “회개하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3:2).” 그렇지만 그에게 세례를 받으러 온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겐, “독사의 자식들!”이라 호통도 치고,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징벌을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어라.”고 엄히 꾸짖었던 것을 보게 된다.
사실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려고 요한에게 다가오셨을 때 그가 거절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단순히 신분의 차이 때문이 아니라, 그분께 죄가 없으신데 자신이 마치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처럼 죄 씻음의 회개를 뜻하는 물세례를 받으신다는 사실이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주님께선 세례를 받으실 필요도 없으시지만, 세례를 베푸신 적도 없다. 그분의 제자들이 세례를 베풀었을 뿐이다.
세례 요한이 주님께 세례 베풀기를 사양했을 때 주님께선 요한의 말이 틀렸다고 말씀치 않으시고, 그에게 자신이 세례를 받으시는 것이 ‘모든 의를 이루는’ ‘옳은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그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은 자신이 죄인처럼 ‘사람의 아들’로 오셨고, 죄인과 하나라는 동질성을 드러내는 첫 번째 공식적, 혹은 공개적인 행동이었다. 이사야의 예언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선 ‘남들이 죄인처럼 여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졌고, 죄지은 사람들을 살리려고 중재에 나선 것이다(사53:12하).’
누가 뭐래도 주님께선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는 죄인의 친구로 오셨다는 공개적 선언이 이미 예언돼 있었다. 주님께서 우리와 같은 죄인의 모습으로, 죄인처럼 오신 것이 ‘모든 의’를 이루는 첫 걸음이요, 결국 자신을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첫 걸음이 바로 자신이 죄인처럼 물세례를 받는 것이고, 주님께서 받은 물세례엔 이미 그분의 죽음이 들어 있다.
만약 예수께서 죄인의 모습을 덧입고 사람의 아들로 낮아지지 않으셨다면, 그는 고난이나 배반, 더구나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셨을 수도 있다. 요한의 세례를 받으신 주님께선 죄인의 훈장, 그로 인한 죽을 자의 신분으로 그의 공생애의 첫 발을 내딛으신 것은 그렇게 낮아지시지 않으셨다면, 죄인들을 위해 죽으실 수가 없으셨기 때문이다. 우리 죄인들은 죄인이면서도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지 않고 마치 의로운 척 바리새인의 삶을 살고 있는데, 죄가 없으신 주님께선 마치 죄인처럼 죄인의 훈장을 앞가슴에 붙이고, 죄인이 걷는 고난의 행군을 죽음의 증표인 물세례로 시작하셨다. 우리는 죄인이 아닌 척 변명하기에 급하지만, 죄 없으신 주님께선 스스로 죄인의 훈장을 달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요단강 물속에 잠기셨다가 나오셨다.
우리 주님께서 이렇게 하실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라는 훈장을 달아 세상에 보내주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스도라는 훈장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요, 자신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신분 표시이다. 그러기에 영안으로 주님을 본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였다. 이것이 우리에게도 믿음의 알파와 오메가여야 한다<우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