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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74): 예수, ‘완전한 사람’으로 시험을 이기시다!(1)
성령으로 충만하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어째서 험준한 유대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며 기도하셨는데 왜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을까? 금식하셨기에 마귀의 시험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마귀가 빵과 단절돼 육신이 배고프신 주님의 그 어려운 때를 이용해 주님을 넘어뜨리려고 시험한 것이다.
이스라엘 여행 시 방문했던 여리고에서 마주 바라다 본 주님께서 시험 받으셨다는 유대광야는 상당한 높은 벌거숭이산으로 거기서 40일간 음식과는 단절돼 굶주리신 중에 마귀로부터 시험 받으신 사실은 누구라도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 지금 그곳 광야의 상당히 높은 위치엔 신부들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 때 고행과 회복을 위해 세운 수도원이 서있는 걸 멀리서 보았다. 보통 사람들과는 철저히 단절된 곳으로 누구도 올라가서 드려다 볼 수 없는 곳이었다. 소위 일상 속에서 실패한 신부들이 고행으로 그들의 영육을 연단해 회복하도록 돕기 위한 수도원이 유대광야에 자리 잡고 있었다. 주님께서 마귀의 시험을 이기신 장소이기에 세상에서 실패한 그들이 유대광야에서 단련해 새로운 삶을 살도록 준비시키는 훈련소로 택한 곳이다.
아무튼 예수께서 공생애의 첫 발을 내딛기 전에 그런 험한 곳에서 스스로 다짐해 40일간 금식하며 기도하셨다면 이해가 되지만, 거기서 마귀로부터 힘든 시험을 거쳐야 할 이유가 무엇이었을 지에 대해선 의문이 든다. 그렇다고 40일간 금식하셨기에 시험 받으신 건 아니다. 누가복음 4장1절은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셨다.’고 밝힌 것을 보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광야로 가신 것이 분명하다. 어쩌면 이스라엘백성들이 이집트에서 해방돼 가나안 땅으로 가는 길과 그 주변들이 모두 광야였고, 그곳에서의 40년간의 방황으로 일 세대들에게 철저히 죽음을 안겨주었던 실패의 연속과 비교해 보면, 유대인의 왕으로서도 백성들의 실패를 스스로 만회해서 그 백성의 왕의 자리에 합당한 신분임을 보여주시려고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허락하신 연단으로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선 ‘완전한 사람, 완전한 하나님’으로 땅위에 성육신 하셨다. 그분의 정체성이다. 하지만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께서 완전한 사람으로 지으셨다. 첫 아담이 에덴에서 마귀의 시험에 실패했는데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께서 완전한 사람으로 시험을 받더라도 그 시험에 승리하기를 하나님께서 바라신 건 당연하지 않겠는가? 첫 사람 아담과 두 번째 아담은 결코 똑같지 않은 신분이다. 두 번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라는 특별한 신분을 가지신 분이시다. 하나님의 신분으로 마귀에게 시험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지만, 만약 그 신분을 지니고 그 능력으로 시험을 받는다면, 첫 아담과는 전혀 다른 신분으로 시험을 치르는 것이니 누가 봐도 공정한 시험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시험을 받으시기 전에 어떤 신분을 포기하셨을까? 당연히 완전한 하나님의 신분을 포기하고 순전히 ‘완전한 사람’으로 시험을 받으셨다. 빌립보서에 보낸 바울의 편지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하면서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빌2:5-11).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6-8절).’
‘자기를 비워서’라는 말은 '자기를 포기했다(gave up).'는 뜻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 대신 오직 ‘사람의 아들’의 신분으로 힘든 시험을 이기셨다는 뜻이다. ‘사람의 아들’이란 약한 신분으로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승리하셨다. 그 승리가 바로 십자가를 지시기에 합당한 ‘완전한 사람’으로 감당하셨지만 당당히 이겨내셨다. 마귀의 시험은 언제나 온전한 신분을 망가뜨리는데 초점을 맞춰 접근해 시험한다. 우린 과연 그런 시험을 받기에 온전하고 합당한 신분일까?<우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