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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79): ‘사랑은 아무나 하나!’(3)
사랑의 선후
그렇다. 사랑이라면 누구든 위에서 먼저 내려주는 사랑을 받고 살아가는 편이 훨씬 편하고 쉽고 안정된 삶이다. 폭포처럼 위에서 내리 사랑이 순리이기 때문이다. 가까운 예로 한 가정에서 자녀들이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라는 것보다 부모나 자녀들 모두에게 안정적인 삶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렇다고, 부잣집의 부모의 자녀 사랑이 더 크고 강하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만약 어느 가정에서 자녀들이 부모가 감당하고 있는 가족 사랑의 몫을 자신들의 어깨에 짊어지고 살겠다고 나선다면, 그들이 과연 효자 혹은 효녀로 단연히 칭찬을 받아야 하는 것일까? 소년 가장, 소녀 가장 등의 호칭이 자의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듯이 부모와 자녀의 사랑의 선후가 바뀌는 것은 순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거스르는 일이다. 자녀들이 아무리 부모를 사랑해도 그것은 부모들의 사랑에 대한 감사와 기쁨과 순종의 반응일 뿐, 부모의 사랑과 견줄 수 있는 만큼의 책임지는 사랑이 될 수는 없다. 부모는 자녀를 위해서 목숨을 내놓을 수 있지만, 자녀는 부모를 위해서 목숨을 내놓을 수 없고, 더구나 내놓아서도 안 된다. 자녀들 중엔 이미 자기 자녀들의 부모이기도 하고, 언젠가는 부모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부모 자녀 사이에서 사랑의 선후를 인위적으로 거부하고, 자녀가 사랑의 주인이 되어 사랑의 주체가 되겠다는 건 무엇보다 힘든 삶의 선택일 뿐만 아니라, 부모를 사랑의 객체 취급하는 것이기에 용납될 수 없다. 자녀들이 부모를 지켜주겠다는 것이 효행이라면, 부모가 자녀를 지켜주는 일은 너무나도 당연한 사랑의 순리이다. 자녀의 그 어떤 효행도 부모의 주체적 사랑을 넘어설 수는 없다. 만약 부모자녀관계 속에서 사랑의 선후가 뒤바뀐 일이 하나님과 인간관계 사이에서 일어난다면, 어찌 될지 생각해보았는가? 하나님의 사랑의 주체의 자리를 인간이 감당하겠다는 나서는 일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하나님께서 장하다고 칭찬해주실 거라고 믿는가? 인간 어느 누가 감히 하나님의 사랑을 흉내라도 낼 수 있단 말인가?
방금 방글라데시에서 사역하고 있는 우리 아들에게서 이메일이 왔다. 그의 편지가 짧든 길든 내가 좋아하는 것은 그가 편지 말미에 붙이는 ‘love, your son’,이란 짤막한 인사말이다. 그가 아버지인 나의 아들로서 나를 사랑한다는 뜻으로 언제든 끝 인사를 그렇게 한다.
사실 나는 그의 아버지로서 그를 사랑하는 것만큼 그가 나를 사랑할 수 없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다. 그저 그의 사랑이란 나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사랑을 순전하게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물론 눈에 보이는 사랑이야 부모로서 그를 위해 베푼 것보다 그가 우리에게 베푼 것이 훨씬 많다. 그것이 사랑이라면 그가 부모 된 우리에게 훨씬 더 많은 사랑을 베풀었다. 하지만, 그가 우리 부모들의 자리를 차지하고 우리를 사랑할 수는 없다. 우리 부부는 내 아들의 부모로서 사랑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나와 아내를 통해 그는 세상에 우리의 아들로 태어났으니 우리는 그를 사랑하는 일에 있어서 무한 책임을 지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우리 아들이 단지 우리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살기를 바라시고, 그도 동의하고 기꺼이 집을 떠나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고 있다. 우리 부부가 그에 대해서 무한책임을 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우리는 그 책임을 그리 오래지 않아 내려놓을 수밖에 없는 약자 중 약자이기에 영원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그 무한 책임을 맡기고 떠났으니 육신의 부모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부모가 아무리 자녀를 사랑하더라도 영원한 사랑의 선후관계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자리를 누구도 넘볼 수가 없기 때문에 그분의 사랑에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을 모두 맡기는 일이 바로 우리 생애에 가장 중요한 선택이 아닐까 싶다. 이 선택이 바로 사랑의 선후를 올곧게 지켜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유일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