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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작은 생각들의 조각글 모음(9)
1. 창조와 심판
창조와 파괴는 동전의 양면이다. 창조주는 모든 피조물의 소유주이시다. 소유주이시기에 하나님께선 자신의 피조물에 대해서 파기하실 권리를 갖고 계신다. 창조주이시기에 피조물의 만사를 심판하실 심판주가 되실 수 있다는 뜻이다. 시간 속에 있는 모든 피조물, 곧 창조주 하나님께선 만드신 모든 것들 중 어느 한 가지도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에서 벗어나 영원히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감히 창조주에 견줄 수는 없지만, 사람도 무언가를 만들어서 자신의 소유로 삼을 수 있기에 자신이 빚어 만든 자신만의 질그릇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것의 소유주이기에 파기해버릴 수가 있다. 하지만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처럼 심판주가 될 수 없는 것은 스스로 시간 속에서 죽음을 맞아야 할 한계 속에 갇혀 있어야 할 존재이기에 심판을 받아야 할 존재일 뿐, 감히 심판주가 될 수는 없다. 창조주께선 창조와 심판의 양면을 모두 책임지실 수 있지만, 한계가 있는 피조물인 인간은 어느 한 가지도 온전히 자기 소유가 될 수 없기에 그 무엇도 파기할 권리가 없다.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인데 그가 마치 주인처럼 무엇을 심판할 수가 있겠는가?
2. 먼지 혹은 티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우리가 하찮게 생각하는 먼지보다 많은 것은 없을 것 같다. 발람이 이스라엘을 말하면서, ‘야곱의 티끌을 누가 능히 세며(민23:10상)’라는 말로 야곱의 자손이 티끌 혹은 먼지처럼 많다는 걸 강조했지만, 일종의 과장법일 뿐, 유구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현재 인구는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사람들을 모두 합쳐도 2천만 명이 조금 넘을 뿐, 티끌에 비교할 수 있을 만큼의 많은 인구는 아니다. 그들의 인구 숫자가 먼지보다 많다는 건 그래서 과장이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먼지를 이겨서 빚어내신 것은 사람을 지으실 때(창2:7) 이미 사람이 돌아갈 고향을 미리 알려주신 것이기도 하지만, ‘야곱의 티끌’이란 표현이나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라는 표현 역시 많다는 의미의 동일한 표현이지만, 믿음의 후손들을 모두 포함한 은유적인 표현일 뿐, 실질적인 숫자 개념은 아니다.
티끌 혹은 먼지의 원래의 뜻은 문자적으로 그대로 마른 흑 혹은 쓰레기, 잡동사니를 지칭한 것이기도 하지만, 은유적으로 표현해서 ‘우리 영혼이 진토 속에 파묻히고(시44:25)’, 혹은 ‘먼지 속에 묻힌다.’는 표현은 죽음의 은유적 표현이다(욥20:11). 유대 사람들이 슬픔이나 회개를 의미할 적에 먼지를 자신의 머리에 뒤집어쓰는 행위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아무 쓸모없는, 쓰레기 같은 존재라는 걸 고백하는 은유적인 표현이다. 미세먼지로 고생하는 한국 사회가 무언가 가진 것 같고, 무언가 무게 중심이 자신들인 것처럼 느껴질 때 미세먼지를 보면서 무언가 느끼는 것은 없을까? 오직 미세먼지를 막아주는 마스크 쓰기에만 신경 쓸 것이 아니라, 미세 먼지의 은유적 의미에 신경을 썼으면 좋겠다.
3. 기생과 공생
「기생충」이란 한국영화가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감독 봉종호는 ‘인간의 대한 예의가 기생과 공생을 가른다.’고 말했다. 그 영화를 보지 않아서 더 이상의 문제를 제기할 수는 없지만, 나는 그에게 흙과 나무와 숲의 공생에서 기생을 따로 떼어내어 기생충으로 분리할 수는 없다는 사실만이라도 들려주고 싶다. 다른 것들과의 더불어 살아가야 한 삶의 관계를 위해서 하나님께선 모든 것을 모두 다르게 지으셨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모두 공생이 있을 뿐, 기생은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두신 것. ‘가난한 자는 너희 가운데 있다.’는 주의 말씀도 공생의 관계에 초점을 두신 선언이다. 가난한 자가 부자에 기생하는 존재가 아니니 더불어 살라고 이르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