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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101): 눈을 뜨고 살까, 차라리 감고 살까?
주님께서 두 소경의 눈을 뜨게 해주시고서 그들에게 눈을 뜬 그 기적 자체를 다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게 엄히 경고하셨다. 누구나 자신의 죄와 부끄러움은 말하지도 말고, 참지 말라고 해도 참을 수 있지만 태어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사람이 주님으로 인해 눈을 뜨게 되었는데 그런 기쁨을 마음속에 묻어두고 참는다는 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기에 주님의 엄중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의 소문’을 온 땅에 퍼뜨렸다(마9:27-31). 하나님의 명령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보다 앞세우는 인간의 특성을 잘 드러낸 사건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뱃새다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사람들이 한 소경을 데리고 나왔을 때 주님께서 그를 고쳐주시고, 고침 받은 그에게 ‘그의 마을로 들어가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눈을 뜨게 된 소경이 가장 먼저 그 기쁜 소식을 전하고 싶은 사람이 그의 부모나 친척이나 그 동네 사람들이었을 텐데 주님께선 아예 그가 마을에 들어가는 것조차 막으셨다. 그들이 눈을 떠서 ‘좋아 죽겠다!’고 말하고 싶은데 눈을 뜨게 해주신 주님께선 그의 기쁨의 출구인 그의 입을 막으셨다. 아무튼 주님의 경고는 두 번의 기적을 통해 눈을 뜬 세 사람에게 동일하게 내려진 명령으로 반드시 따라야 했었다. 그렇다면 왜? 주님께선 그들에게 그토록 좋은 소식에 함구령을 내리셨을 지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자신의 기쁨을 말하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 아닌가? 헌데 주님께선 막으셨다.
나는 한 마디로 말해서 사람들이 눈을 뜨고 밝은 눈을 가지고 이것저것을 모두 볼 수 있는 것이 다 좋을 수만은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하신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 생각, 우리 눈에 좋다고 해서 다 좋은 것일 수 없다는 말이다. 정말 ‘눈을 뜨고 살까, 감고 살까?’, 이런 고민을 마음속 깊이 품게 되었다. 먼저 우리 인간의 조상의 죄가 무엇이었든 지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에덴에서 그의 눈에 보인 나무 열매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사람을 슬기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였다(창3:6).’고 표현한 걸 봐서 한 마디로 말해 우리 인간의 조상의 눈이 밝았고, 그가 좋아하는 것에 특히 눈이 밝았던 걸 알 수가 있다. 하지만, 그가 눈이 좋아 자기 눈아 보이는 열매를 따먹은 죄가 우리 모든 인류를 죄인 곧 영적 맹인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러면서도 육안으로 사물을 볼 수 있기에 실제로 앞 못 보는 당달봉사인 걸 알지 못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해주셔서 볼 수 있게 만드신 기적은 소경의 눈을 뜨게 해주신 기적을 통해 육안은 멀쩡해도 실상은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는 영적 소경이 곧 용서를 받아야 할 죄인임을 경고하시기 위함이었다는 걸 알 수가 있다.
태어날 때부터 소경이 된 한 사람이 주님에 의해서 고침 받은 기적을 보면서도 그것을 믿지 못하는 종교인들, 곧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주님께선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을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을 맹인 되게 하려 함이라.’하시고,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9).’고 의미 깊은 선언으로 책망하셨다. 한 사람이 소경 된 것이 그의 부모의 죄인가, 소경 본인의 죄 때문인가 묻던 제자들의 의문에도 분명한 답을 주신 것이다.
우리가 무슨 일 한 가지를 해놓고, 자기 눈에 좋은 것인지 혹은 남의 눈에 좋은 일인지를 판단해서 자기 유익한 쪽으로 받아들이려는 생각에 여념이 없지만, 자신에게 좋은 것이 남의 눈에 좋게 보이면 그것으로 기뻐하는 무리들이 있다는 사실을 아시고, 중요한 것은 우리 눈에, 아니 우리 생각에 좋은 것이 곧 하나님의 생각이나 하나님의 뜻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알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눈이 밝은 것은 좋은 것,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은 나쁘고 혹은 저주 받은 것, 이렇게 나누어서 자기 좋을 대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이 과연 좋은 일인지, 혹은 옳은 일인지를 꼼꼼히 생각하고 살았으면 좋겠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일이 모두 하나님께도 좋은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