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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108): 죽음과 부활, 슬픔과 기쁨이 뒤섞인 눈물
폐일언하고, 인간의 죽음은 슬픔이다. 어느 누구의 죽음이라도 기쁘고 속 시원하다고 말할 죽음은 없다. 슬픈 일을 당하면 누구나 우는 것이 지극히 정상적이다. 연기자들은 드라마나 영화를 찍을 때 눈물 흘리며 우는 연기를 해야 할 장면이 있으면 사전에 굶어서 배를 비우는 경우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배가 부르면 눈물이 나지 않기 때문이란다. 슬픈 일을 당하면 배가 고플 만큼 뭘 먹지 못하니 눈물이 나고 울음이 나오는 것이 정상인 모양이다. 그 어떤 죽음도, 그 누구의 죽음도 인간의 죽음의 소식을 들으면 차별 없이 깊은 슬픔으로 받아들여 다른 이의 슬픔에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슬픔에 공감할 수 없으면 기쁨도 함께 누릴 수가 없다. 자신이 항상 넘치는 기쁨을 안고 살아간다고 해도 남의 슬픔까지 당연시할 수는 없다.
주님께서 그 당시의 세대를 비기시면서 아이들의 말을 인용하신 걸 볼 수 있다.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길까?’ 하시면서 아이들이 한 말을 이렇게 인용하셨다. ‘우리가 너희에게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을 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해도 너희가 울지 않았다(마11:16-17).’
주님 당시의 유대사회가 세례 요한과 주님께서 전하는 슬픔이나 기쁨의 복음에 반응하지 않는 상황을 염두에 두신 예로 보이지만, 세례 요한이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아마도 슬픔 때문이었을 터) 열심히 회개를 외쳤을 때, 유대인들은 귀신 들렸다고 그를 비난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께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시니’ 그들은 ‘저 사람은 마구 먹어대는 자요, 포도주를 마시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다.’ 이렇게 비난하며 마치 주님을 상종 못할 사람인 양 배척한 사실을 지적하셨다.
세례 요한이 회개를 외친 것은 하나님과 단절돼 죽은 자들이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께 나와서 다시 살길을 찾도록 배고픔의 눈물을 안고 전한 복음이었지만, 그를 귀신들렸다고 비난하고, 주님께서 전하시는 생명의 복음을 받아 구원 받기를 바라고 전한 것이지만,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권력 하에 붙잡힌 노예로 살아가면서도 전해진 복음을 듣고서 ‘이제야 살게 되었다!’,라며 가슴 치는 기쁨으로 인해 눈물 흘리는 슬픔 마음조차 메말라 있었다.
주님께서 사랑하는 나사로의 무덤을 찾아가셔서 눈물을 흘리시며 우신 것을 볼 수 있다. 주님의 슬픔의 눈물을 보고 유대인들은 주님이 나사로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알았다. 슬픔의 눈물은 단순히 슬퍼서 우는 것만이 아니라, 사랑의 표현이란 뜻을 새겨보았으면 싶다. 인간은 하나님과 단절돼 영적으로 죽었기에 사실은 하나님의 긍휼의 대상이요, 하나님의 긍휼을 전하시려고 예수께서 인자로 세상에 오셨는데 그분의 풍성한 긍휼 앞에서 감사와 기쁨에 겨워 가슴을 치는 기쁨의 눈물조차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주님께서 죽은 지 나흘이나 돼서 이미 냄새나는 나사로를 살리셔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고, 자신이 유대인들이 믿는 그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위해 자신을 메시야로 보내신 사실을 알도록 베푸신 기적이었지만, 그들은 주님의 눈물을 단순히 나사로를 향한 개인의 사랑으로만 이해하고 말았다. 우리 주님의 슬픔은 단순히 나사로의 죽음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주님의 마음의 표현이었고, 부활을 향한 기쁨의 눈물이었을 수도 있다.
인간의 죽음은 하나님과의 영원한 관계와의 단절로 시간 속으로 추방된 삶 속에서 한정된 시간 속에서 아픔과 늙음으로 힘들게 살다가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을 때 숨을 거두는 마침표이기에 그를 아는 사람들과 사랑하는 가족과의 단절 앞에서 슬픔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천국 가는 기쁨으로 극복할 수 있는 슬픔도 아니고, 우리 주님의 위로가 부족해서 슬퍼하고 눈물 흘리는 것도 아니다. 부활의 소망이 있기에 극복할 수 있는 슬픔도 아니다. 아무리 일시적이라고 해도 사랑하는 어느 누구와의 단절은 단장의 아픔이요, 가슴을 찢는 슬픔이며, 하나님의 긍휼을 향한 소망의 슬픔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