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 게시판
HOME > 나눔터 > 나눔 게시판
짧은 글(124): 하나님의 과학(2)
하나님의 과학은 다음의 시구에서 한 번 찾아보고 싶다. 「시와 과학」을 쓴 작가 박이문은 ‘언어로 표현되기 이전엔 학문이 성립되지 않는다.’고 말했고, ‘시는 언어로서 시작되고 언어로서 끝난다.’고 쓰고 있다. 나는 감히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에 하나님의 과학이 적용되었다는 말을 하고 싶다. 하나님의 그 말씀, 그것이 시(詩)든, 산문이든, 행하신 기적이든 모두 하나님의 과학이다.
‘주님, 새벽에 드리는 나의 기도를 들어주십시오. 새벽에 내가 주님께 사정을 아뢰고 주님의 뜻을 기다리겠습니다(시5:3).’
인간은 음성언어로 하나님을 향해 주저 없이 기도한다. 음성을 높여야 할까, 아니면 속삭이듯 음성을 낮추어 기도를 드릴까, 이런 고민은 필요치 않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드리는 침묵의 소리조차 들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귀로 소리를 들으면서 신기한 경험들을 많이 하지만, 인간의 과학으로도 설명이 가능하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무심코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는 귀를 막으면 혹은 태어날 때부터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자로 태어났다면, 아무리 부모의 사랑의 음성이라도 들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우리에겐 흔히 새벽에 묵념하듯 드리는 소리 없는 기도가 있다. 만약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소리로 기도해야 들으신다면, 우리의 목청이 터져나갈 위험이 있을 것이다. 온갖 소음으로 우리의 귀가 따가운 판국에 우리가 모두 큰 소리로 기도한다면, 아마도 가까이 있는 사람의 귀도 상해서 온전치 못할까 걱정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과학에선 인간에게 가청 능력에 한계를 부여하셨다. 인간이 큰 소리든 작은 속삭임이든 모든 소리를 모두 듣는다면, 과연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지 걱정이 앞서기에 가청 능력의 한계를 부여하신 하나님의 과학에 먼저 감사드리고 싶다. 만약 지구의 자전과 공전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우리 인간을 비롯한 모든 동물들의 귀가 온전할 수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큰 소리를 들을 수 없도록 인간의 귀엔 가청 능력의 한계를 두셨다. 모든 소리를 모두 듣는다고 해서 귀가 좋은 것이 아니고, 모두 다 들어야만 정상이거나 좋은 것도 아니다. 한계를 부여하신 것도 하나님의 과학이다.
만약 우리의 눈이 좋다고 해서 초미세먼지까지, 혹은 현미경을 통하지 않고, 우리의 육안으로 세균까지도 샅샅이 볼 수 있다면, 진정 일상을 어찌 살아가겠는가? 하나님께선 우리 눈의 가시 능력에도 한계를 부여하셨다. 무엇이든 모두 눈에 모든 것이 보여야 좋은 것은 아니란 뜻이다. 모든 것을 보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이면 족하고, 하나님 외에 모든 피조물이 전지전능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의 뜻이다.
나는 자주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하나님께서 하실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한 가지를 들라면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또 다른 하나님을 만들지 못하신다는 것이다. 피조물은 피조물로서의 한계가 있지만, 그 한계 때문에 인간이 잘못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피조물로서의 한계를 뛰어넘거나 넘으려 하는 것이 창조주 하나님께는 죄이고, 그것이 하나님과의 단절을 불러들여 죽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과학을 뛰어넘을 수 있는 존재는 없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만이 마치 하나님처럼 되려고 한 오만이 인간에게 비극을 가져다 준 것이다. 하나님께선 우리의 침묵의 소리도, 소리 없는 마음속의 기도도 들으신다. 우리 인간의 과학과는 거리가 멀지만, 하나님의 과학은 가능하시기에 속마음의 기도도 들으신다. 새벽에 드리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우리 마음의 감격의 떨림도 들으시지만, 우리의 불안한 마음도 읽고 아신다. 인간의 과학은 가청능력의 한계를 어느 정도 극복할 수도 있다지만, 하나님의 과학은 우리의 마음속의 세미한 음성도, 우리 가슴속에 품고 있는 소리 없는 소원도 들으시고 응답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