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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132): 행복의 변주곡
나의 소박한 행복관이 상식적으로 통할 수 있을까, 의문이지만, 어느 한 사람 빠짐없이 행복을 바란다는 의미에서 무조건 ‘행복은 좋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행복은 좋다!’고 말하는 사람은 지금은 불행하거나 혹은 불행했던 과거에서 탈출해 지금은 행복을 누리는 사람일 수 있다. 행복을 잃은 경험이 있기에, 다시 말해서 이미 불행을 경험했기에 행복이 좋다는 걸 알 수 있다는 뜻이다. 행불행의 순서는 행복인 먼저이고, 불행은 앞에 있는 행복과의 비교해서 비롯된 아픔의 경험이다. 현재의 불행의 감지는 전에 있던 행복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란 뜻이다.
사실은 자신이 행복한 줄도 모르고 있을 때, 곧 자신의 행복을 감지할 수 없을 때가 실제로는 행복한 경우에 속하지만, 행복을 잃고 난 후에야 비로소 그 행복과 비교해서 불행을 감지하게 되니 이미 떠나버린 행복을 되찾기가 쉽지 않다.
행복의 변주곡 안엔 분명히 불행이란 곡조가 숨겨져 있기에 변주곡이라고 말한다. 하나의 음악에 여러 가지 주제가 섞여있을 때 그런 노래를 변주곡이라고 말한다. 행복을 주제로 한 노래가 많지만, 실제로 행복은 불행 없이는 감지하기 힘들기에 행복을 노래할 경우라도 그 안에서 불행을 감지할 수 있어야 한다. 건강했던 사람이 병들었을 때, 건강과 건강을 잃은 아픔이 곧 행복과 어울리는 변주곡이라고 말하면 이해할 수 있을까?
하나님께선 사람을 지으시고, 그들 부부를 에덴이란 낙원, 행복한 동산에서 부부가 함께 행복을 누리며 그 안에서 살게 하셨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불행도 몰랐고, 그곳이 행복의 동산인 줄 모르고 살았다. 그들은 그 동산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불행이 무엇인 줄 알게 된 것이다. 아담과 하와의 실상이 곧 우리 모든 인간의 실상이다. 하지만, 그들 부부가 조금만 더 하나님의 말씀에 민감하고 그분의 깊은 뜻을 살펴서 알아차렸더라면, 그리 쉽게 불행의 늪으로 빠져버리진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선 특별히 에덴이란 낙원을 창설하시고 그들의 삶의 터전으로 주시면서도 낙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죽음의 비극(창2:17)이 선언되었기에, 그 선언을 보다 깊이 묵상하고 주의를 기울였으면 좋았을 텐데 라는 아쉬움이 있다. 사실 죽음의 선언 직전의 선언은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2:16).’이다. 이것이 먼저 선언된 큰 행복의 선언일진대 비극의 열매는 단 한 가지였다. 오직 한 가지 불행의 열매를 탐했으니 사람이 핑계할 수가 없다. 행복의 낙원 에덴과 그 동산에서 벌어질 죽음의 불행, 정령 어울리지 않는 변주곡이 에덴동산에 울려 퍼지고 있었지만, 그들은 그 변주곡을 깊이 있게 듣지 못하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쩌면 그들은 행복이 무엇인줄도 감지하지 못한 채 살았으니 죽음의 경고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죽음을 본 적도 경험한 적도 없었다고 변명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하지만 그들은 행복이 무엇인지조차 깨닫지 못했기에 죽음의 불행조차 신경 쓰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 세상에선 그 어디서든 행복과 불행의 변주곡은 끊임없이 계속 울려 퍼지고 있다. 개인이나 가정에도 그러하고, 사회나 교회 안에서조차 그러하다. 어느 한 면만 연주되는 음악이 없는 것처럼 생명을 살고 있다면, 누구도 어느 한 면만을 붙들고 살아갈 수가 없다.
그래도 사람들은 굳이 행복과 불행이 동전의 양면처럼 한 몸으로 존재한다는 걸 무시한 채 어느 한 면만을 보고 살아간다. 그렇다고 늘 웃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늘 울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어느 한 면에 붙들려 달리고 또 달리면서 다른 한 면의 실체를 무시한 채 누군 행복을, 또 다른 누군 불행만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살고 있다.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할 때 거짓된 행복을 추구했기 때문은 아니었는지, 혹은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할 때, 우리 주님의 고통스러운 죽음이 자신을 죽음에서 살릴 행복의 원천을 외면하고 살고 있지는 않았는지, 진정 행복의 변주곡을 다시 한 번 음미해보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