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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147): ‘언어의 줄다리기’ (3)
앞글에서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동산 중앙에 두시고, ‘그 열매를 따먹는 날에 죽는다.’고 경고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자유의 바른 정의를 알게 하시려고 설치하신 빨간 신호등이란 말로 예들어 설명했다. 에덴의 중앙에 심어놓으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사람이 거기에 걸려 넘어져서 죽을 수밖에 없는 걸림돌로 심어놓으신 것이 아니라, 그 한 가지만 따먹지 않고 하나님께 순종한다면, 다른 모든 것을 자유롭게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신 하나님의 선악 구별법이었음 밝히신 것이다. 그 하나의 금지 조항이 없다면, 그 외에 모든 것들이 허락된 자유인 줄도 모르고 부자유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주신 유일한 부정명령이었다. 자유를 모르고 사는 자의 신분이 과연 누구인가? 형무소의 수감자가 아닌가?
인간의 행위로는 그럴 듯해 보이지만, 선(善)이 무엇이며 악(惡)이 무엇인지를 언어 줄다리기로 우리가 해결해 보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선악을 구분해서 이것이 선이고, 저것은 악이라고 구분하는 것 자체가 바로 하나님 앞에서 죽을죄라는 걸 알도록 미리 선언해 놓으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선악을 아는 것이 왜 죽음이란 형벌을 불러들인 것일지에 관한 의문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의 언어 줄다리기로 선악을 구분하는 것이 곧 죽음이란 말을 이해하겠는가?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그 열매를 따먹고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과 하나’가 되긴 했지만, 그 지식이 곧 그들을 죽음에 던져서 죽은 자로 살게 되었으니 그들이 습득한 선악을 아는 지식은 결국 아무 쓸모없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선악의 지식은 곧 죽은 자의 지식, 곧 상처뿐인 영광이란 뜻이다.
죽은 자는 모든 법에서 벗어난다. 선악을 아는 자의 죽음이란 결국 자신을 죽인 선악을 아는 지식의 굴레에서 벗어나 온전히 하나님께만 속한 자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이것이 구원이고, 다시 사는 새로운 생명이다.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법에 안겨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살아갈 수 있는 자로 다시 태어나야 하기 때문에 죽음과 다시 태어남은 하나님의 구원의 유일한 은혜인 셈이다.
하나님께선 왜 인간에게 선악을 아는 일을 죽음의 경고를 붙여서까지 그토록 엄히 막으셨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길 것이다. 혹자는 선악의 지식을 알아야 우리가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할 수 있지 않느냐고 의아해 할 수도 있다. 먼저 밝혀두자면, 선악을 구별할 줄 아는 것이 인간이 지닌 특권이라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첫 오해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 인간의 눈으로 여러 가지 행위들을 보면서 선악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지음 받은 피조물인 인간이 어떻게 선악을 구분할 수 있을지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사람이 지음 받기 전에 하나님께서 온 우주만물을 지으시며 모든 피조물을 모두 좋다, 곧 선하다고 선언해 놓으셨는데, 맨 마지막에 지음 받은 인간이 어찌 창조주 하나님께서 좋다고 선언하신 것을 이래저래 평가하며 ‘좋다.’, 혹은 ‘좋지 않다.’, 이렇게 평가해 말할 수가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들을 보거나 혹은 하신 일들을 보면서 내가 혹은 네가 좋다 혹은 좋지 않다고 평한다면, 나 혹은 네가 하나님 노릇 하는 것이 아닌가? 결국 인간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떠나게 되면 곧바로 누구든 자신을 붙들든지, 혹은 하나님 외에 다른 것들을 붙들고 그런 것들에 순종하며 섬기고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런 행위가 곧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우상숭배라는 걸 알아야 한다. 애당초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선악 판단을 위한 지식을 금하신 것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 인간이 알아야 할 지식의 최선이란 뜻이다. 우리 행위의 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을 나도 그대로 따르고, 하나님께서 좋지 않다고 말씀하시면, 나도 그것을 받아들여 멀리 피하는 것이 하나님의 선악의 지식을 따라 순종하며 사는 우리의 삶이다. 선악은 인간의 주인노릇으로 결정되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지식에 순종할 때만이 그 열매를 아름답게 누릴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