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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148): 씨앗으로 뿌려지기를!
초겨울의 쌀쌀한 맛을 온 몸으로 느끼며 공원을 거닐거나 산림보호구역 안의 산책길을 거닐다 보면 잎을 모두 떨어뜨린 채 앙상한 가지들에 다닥다닥 달려있는 붉거나 노란 아름다운 이름 모를 열매들을 볼 수 있다. 이름을 몰라서 안타깝긴 하지만, 그렇다고 굳이 이름을 꼭 알아야 할 필요가 있겠는가 싶다.
나는 오늘 아침 글렌뷰에 있는 한 공원을 산책하면서 잘 익어 보이는 빨간 열매 하나를 따서 깨물어보았다. 풋과일처럼 너무 시어서 당장 내뱉었다. 사람들이 먹을 열매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다람쥐가 토기나 사슴이나 새들이 임신한 여성처럼 신맛에 길들여져서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먹을 과일이든, 짐승들의 먹이로 주어질 과일이든 새콤달콤한 과육이 씨앗을 감싸고 있는 것을 보면서 참 아름답게 포장된 열매라는 생각이 들면서 교훈 하나도 얻게 되었다. 나무들이 열매를 맺는 이유가 무엇일까? 첫째 이유가 생명의 번식이라면, 그 일을 위해서 새콤달콤한 보기 좋은 과육을 더불어 살아가는 족속들에게 나눠주는 건 두 번째 이유일 것 같다. 짐승들이 먹든 사람들이 먹든 과육(果肉)을 먹고 나면 씨앗은 비록 버려질지라도, 혹은 과육과 더불어 먹는 짐승이나 사람들의 몸에 들어가더라도 다시 뒤로 나와서 어디든 심겨진다면 나무들의 원하는 생명의 승법 번식은 계속될 테니까 말이다. 어릴 때 소위 똥 참외나 수박을 먹어본 사람들이라면 맛있고 풍성한 과육 속에 숨겨진 작은 씨앗들의 의미를 왜 모르겠는가?
조그마한 나무로서는 버거울 만큼 헤아리기 어려운 많은 열매가 맺혀 있는 이유를 생각해보았다. 많은 새들이 수없이 쪼아 먹어도, 그들 때문에 땅에 떨어지는 열매 중에서 다만 몇 개라도 땅에 떨어져 새싹을 낼 수 있기 위해선 일단 나무의 열매가 풍성히 열려야 하지 않을까 싶다.
크리스천들은 각자 자기 안에 복음의 씨앗, 곧 생명의 씨앗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우리 속에 있는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지 않는 것은 내가 바로 과육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은 아닐까? 씨앗을 품고 있는 과육은 짐승이나 사람이 먹질 않아도 썩어서 자기 안에 있는 씨앗을 내놓게 돼 있다. 과육을 아름답게 단장하고, 건강하게 돌볼지라도 자신이 죽지 않으면 복음의 씨앗이 뿌려질 수 없다는 걸 모르고 있단 말인가?
복음을 위한 죽음이라면 ‘썩은 밀알’처럼 수 십 배의 결실을 맺을 수도 있지만, 내가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이 진정 영양가 없는 삶이 아니겠는가? 혹시 우리 가정이나 교회가 이웃이나 세상을 향해서 과육을 내어주지 않으니 그 안에 있는 복음의 씨앗이 화려한 과육에 갇혀 숨을 쉬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개인이나 교회가 외형만을 꾸미고 과육만을 단장하는 것은 복음의 생명을 자기 속에 품고 혼자서 살아가겠다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우리 속에 있는 씨앗들의 과육을 벗어나 제2, 제3의 생명을 낳을 수 있도록 과육이 죽지 않으면, 오히려 그 안에 있는 씨앗을 질식시켜 죽게 만들어버릴 것이다.
나는 항상 토실토실하고 보기 좋은 과육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씨앗으로 뿌려지기 위해서 볼품없는 과육이나마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내 속의 씨앗이 또 다른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어디엔가 뿌려지도록 할 것인가? 이것은 내가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다른 사람을 복음의 씨앗으로 살리느냐 죽이느냐의 문제이다. 또 이렇게 자문해 보아야 한다. 나는 혹시 우리 가정이 살찐 보기 좋은 과육으로 남아 있게 할 것인가, 아니면 과육을 벗겨내고 씨앗으로 뿌려지게 할 것인가? 우리 교회는 먹음직하고 살찐 과육으로 남을 것인가, 아무리 보기 좋은 과육이라도 그것을 벗겨내고 그 안에 있는 생명의 씨앗으로 뿌려질 것인가? 과육의 겉모습이 보기 좋은 교회는 그 안에 복음의 씨앗이 질식되고 있지 않은지 살펴야 한다. 그렇다. 한 알의 밀알처럼 썩어야 살게 되는 생명의 승법 번식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