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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154): 가난한 자의 건강한 꿈
누구에게나 꿈은 클수록 좋은 것일까? 대개 어른들이 어린 소년 소녀들을 격려해 주는 의미에서 최고인 듯 대통령이 되는 큰 꿈을 가지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그런 꿈은 그들의 약하고 어린 현재를 기준해서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말로 전해주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너무 먼 미래의 아물거리는 큰 꿈이 아니어야 한다. 너무나 과장되고 너무 부풀린 꿈을 제시해 강조하는 건 어린아이들에겐 너무나 허황된 격에 맞지 않은 격려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저 ‘오늘도 건강하고 바르게 살자!’ 이런 격려가 바른 꿈을 날마다, 그리고 영원히 실현해 가는 시작이 바로 오늘이라고 강조해 주면 어떨까 싶다. 먼 미래의 꿈이 아니라, 오늘 하루의 삶을 따뜻하게 감싸주고 건강하게 살도록 격려해주는 것, 그 자체가 바로 어린아이들 각자의 꿈을 날마다 순간마다 살찌워주기에 충분한 시작이 아닐까?
야곱의 꿈은 어머니의 태중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진정 약하고 가난한 자, 그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런 꿈이었다. 하지만 그건 야곱 자신의 꿈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꿈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의 꿈이라고 해도 그리 쉽게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하나님의 꿈을 실현하시려고 먼저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셨지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이삭이 태어난 것도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 때였고, 야곱은 태어나서 형 에서로부터 생명의 위험을 피해서 부모 곁을 떠나야 했고,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머슴살이 하면서 오직 한 여인 라헬을 사랑했지만, 결국 네 여인의 남편이 되었고, 딸 하나와 열한 아들을 낳았지만, 야곱과 그들의 가족은 결국 외삼촌 라반에 붙들려 살아가는 종의 신세에 불과했다. 그런 종의 삶이 그 가족들이 꿈꾸는 삶일 수는 없었다. 야곱과 그의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의 꿈은 더더구나 아니었다.
현재 무언가에 붙들린 삶에서 벗어난다는 건 단순히 개인의 자유 추구가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께 붙들려 살아야겠다는 믿음의 순종을 다짐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이 날마다의 새로운 꿈이어야 한다. 모든 것들에서 풀려나는 것이 자유일 수는 없다. 법 없음의 무법천지가 아니어야 하듯이 오직 하나님께 붙들린 자유인이 되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한다. 이것은 먼 장래의 꿈이 아니다. 바로 오늘부터 날마다 계속되어야 할 진행형의 꿈이다.
오늘 우리 내외는 고등학교 4학년인 둘째 손자가 다니는 학교에서 조부모들을 초청하고 수업을 참관한 후엔 손자가 사주는 점심도 얻어먹고, 물리 수업과 국제관계 등에 관한 수업을 참관한 후에 복도에 걸쳐 앉아서 손자와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우리 내외는 먼저 손자에게 현재 대학 2년생인 형과 그의 관계가 어떠한지를 물었다. 그들의 장래의 꿈을 물은 것이 아니라, 현재 진행되고 있는 그들의 현재의 꿈의 진행을 알고 싶었다. 큰 손자는 이미 무엇을 할 것인지 정하고 컴퓨터 공학을 택해 대학에 입학해서 큰 어려움 없이 벌써 2학년 중반을 지났고, 작은 손자도 산업 공학을 전공한다며 입학 원서를 준비해 여기저기 보내는 중이니 장래 희망을 물을 필요는 없다 싶어서 그들의 현재 신앙생활이 어떠한 지를 물은 것이다. 우리 부부는 항상 그들 형제의 신앙생활에 관심을 갖고 기도하고 있으니 우리 부부의 관심은 현재의 꿈이었다.
이젠 별로 걱정할 것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 손자는 대학에서 기독 학생회의 예배인도 리더로 활동하면서도 매일 아침 성서를 묵상하고, 집에 있는 동생의 전화기에 보내서 동생과 함께 성서를 묵상함으로 하루를 시작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아직 어리고 부모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가난한 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어리고 가난한 자들이지만, 하나님과 연결된 건강한 꿈을 안고고 하루하루 충실하게 살아가고 있으니 기쁘기 그지없다. 세상 가치관의 창달은 아무리 커도 결코 꿈의 대상일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