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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156): 삶과 쉼의 이어가기(3)
1. 하나님의 법과 자유
하나님께서 에덴에서 첫 사람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부정 명령, 오직 한 가지만을 법으로 세우셨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에게 자유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려는 조치였다. 그 하나의 부정명령이 법으로 존재치 않았다면, 사람은 모든 것이 긍정명령이라며 무법자의 자유를 누릴 수밖에 없었다. 곧 자유가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고 아무데서나 ‘홀라당 벗고 깨춤 추는’ 것도 자기 마음대로의 자유 행사라고 즐겼을 것이다. 첫 사람이 부끄러움과 두려움으로 자신들의 벗은 몸을 나뭇잎으로 가렸을 때 하나님께선 짐승의 가죽옷을 입혀주셔서 자유 잃은 자의 추한 몰골을 미리 가려주셨다. 짐승의 가죽옷은 곧 주님의 죽으심을 미리 보여주신 상징이다.
2. 에덴과 가나안
하나님께서 에덴을 창조하셔서 첫 사람에게 맡기셨을 때 그들은 낙원의 주인으로 아무런 어려움 없이 그 에덴을 맡았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가나안을 주셨을 땐 피를 흘리며 고난 중에 전쟁을 겪어야 했다. 아무런 수고나 어려움 없이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에덴을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너무 쉽게 맡겨주셨기 때문이었을까, 그들의 실낙원이 너무 쉽고 빠르게 다가왔다.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땅 차지가 그토록 오랜 기간 동안 힘들고 어려웠던 것은 너무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잃는다는 걸 보여주기 위함이었을까?
3. 부(富)와 가난
자녀가 부모와 단절되면 고아가 되듯이 사람이 부(富)와 단절되면 가난이 된다. 부와 주종관계를 청산하면 그가 소유하고 있는 많은 부(富)와 상관없이 그는 가난이라는 축복을 누릴 수가 있다. 예수께서 ‘부요하나, 여러분을 위해서 가난하게 되셨습니다(고후8:9).’라는 선언처럼 그분의 가난은 우리에게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게도 축복이었다. 축복은 즐거움이요, 행복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선 우리 가난한 자를 위해서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가난하게 되셨다.
4. 어린아이
애당초 사람은 갓난아이로 창조되지 않았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갓난아이 옆에서 유모 노릇 하실 수가 없으셨기 때문이었을 터. 사람은 애당초 장성한 성인으로 지음 받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은 처음부터 창조주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가 있었고, 또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에 책임을 져야 할 존재였기 때문이다. 사람이 범죄하고 그의 책임을 다할 수 없게 된 후엔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진짜 어린아이가 되기를 바라셨다. 부모에게서 태어나 어른이 되더라도 하늘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중생으로 어린아이가 되기를 바라셨다. 하나님께선 늘 어린아이를 원하시고, 또 소자라 부르시길 즐기신 건 더 이상 사람은 에덴의 주인이 될 수 없고, 하나님께서 주인이신 하나님의 동산에서 그분의 보호 하에 살아가는 어린아이가 되기를 바라셨기 때문이다.
5. 복수(複數) 개념
세상엔 똑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종류가 다른 두 가지 이상의 것을 복수로 표현하는 대명사는 가능하다. 그러나 똑같은 것이 여러 개 존재한다는 복수 개념은 잘못된 것이다. 세상엔 똑같은 것이 하나도 없기에 하나는 영원한 단수로 존재할 뿐이다. 최고의 가치는 하나일 수밖에 없으니 언제나 최고의 가치는 상대적 가치가 아닌 하나에서 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