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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159): 죽어야 사는 것, 이것이 복음이다!(1)
대학생 신앙 수련회에 참석했을 때의 이야기이니 반백년을 훨씬 넘어 거의 60년이 돼간다. 오전 강의가 끝나고 식사 시간이 되었는데, 당시 유명 강사들이 밥그릇을 들고 학생들과 더불어 길게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모습이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한 때의 신선한 충격을 경험하고 난 후엔 그렇지 않은 장면을 볼 때 쉽게 비평하는 버릇이 나오게 마련이다. 그 때문일까? 선선한 충격이 가져다 준 아름다운 경험을 오래 간직하지 못한 채 늘 아쉬운 마음으로 살아오고 있다. 강사와 학생들이 함께 줄을 서서 한 끼의 식사를 했던 모습에서 그토록 신선한 충격을 받았으면서도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그 일에 왜 신선한 충격보다는 오히려 당연시 하고 그 의미를 헤아리지도 않고, 쉽게 넘어가버린 것일까? 우리 주님의 그런 행적을 책 속에, 활자 속에 묻어버리고 당연시하고 지냈던 어리석음을 뒤늦게나마 후회하면서 이 글을 쓴다.
크리스천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바로 죄인인 우리를 살린 복음이라는 것을 알고 전하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그분의 죽음 직전에 하셔야 할 보다 중요한 일이 더더욱 많으셨을 텐데 왜 하필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을까? 더구나 베드로를 비롯한 다른 제자들은 물론이고, 그 사실을 읽어서 알고 있으면서도 그 중요성의 의미를 감지하지 못하고 살고 있는 것일까?
지금도 그 일을 종교의식처럼 따라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제자들에게 겸손을 가르치신 교훈이 아니라, 주님 자신의 죽음이 무엇을 위한 섬김인지를 말씀하신 것이다. 교리나 결례도 아니었고, 주님께서 떠나신 후에 제자들이 따라 살아야 할 삶이었기에 실제로 죽음을 연습하고 죽임을 당하는 삶이 살아 있는 제자들 속에 그대로 나타나지 않았는가? 그리스도의 제자란 단지 성서를 가르치고 교리를 전하는 자가 아니라, 죽음으로 죄를 씻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날마다 죽음의 연습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오직 죽음으로 전해진다. 문자적 복음, 책에 쓰인 교훈의 어떤 감동으로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교훈적 교리와는 전혀 다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그의 죽음을 믿고 그와 함께 죽는다는 말이다. 죽어서 다시 사는 것, 이것이 복음이다. 우리는 흔히 ‘믿음인가, 행동인가’,라는 양자택일의 어리석은 질문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경우가 많다. 믿음은 믿음을 주신 분을 따르는 순종이요, 결국은 죽음이다. 죽어서 이 땅을 떠날 때까지 하나님을 떠나지 않아야 하니까 말이다. 순종과 죽음만큼 확실한 행동이 어디 있는가? 단지 행동의 강조는 순종도 못하고 죽지도 못했을 때,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체면치례일 뿐이다.
행동은 대개 하나님 앞에서라기보다는 사람들 앞에서 그들의 눈에 보이게끔 땀 흘리는 노력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물어보라. 누구의 행동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는지를, 어느 개인의 행동보다는 어떤 놀라운 기적을 보고 예수를 믿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법하지만,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주님의 기적을 옆에서 목격하고서도 주님을 믿기보다는 오히려 살아난 나사로까지 죽이려 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성서는 하나님의 구원계획 총서일 뿐, 우리의 행동에 초점을 맞춘 도덕 교과서는 아니다. 완전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도덕적 행동이 무슨 빛을 볼 수 있겠는가? 세상을 떠나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가야 할 때가 가까운 줄 아시고, 주님께선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으로 허리를 동이신 후 대야에 손수 물을 부으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고, 허리에 둘렀던 수건으로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셨다. 단순히 주님의 겸손을 가르치는 교훈이 아니다.
베드로는 자기 발을 주님 앞에 내놓기가 민망했든지 자기 발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주님께선 그의 행동을 보시고,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요13:8)’고 말씀하시자 ‘주여 내 발뿐만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소서’,라고 요청했다. 아무튼 베드로는 주님께서 자기 발을 씻겨주신 그 의미를 몰랐다. 발 씻음이 곧 온몸의 씻음이라고 설명해주셨다.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곧 그가 죄로부터 씻음을 받는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알기를 바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