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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161): 노인과 치약
나의 이 글 제목이 마치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란 소설의 제목을 닮은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내 글을 대문호의 작품에 빗대어 흉내를 내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나는 오늘 아침에도 이를 닦으려고 오랫동안 사용해서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바뀐 늙은 치약 튜브를 또 눌러 짜내면서도 그냥 버려야지 마음먹은 지도 꽤 오래되었지만, 날마다 짜고 또 눌러서 아무리 쓰고 또 쓰더라도 줄어들긴 해도 없어지지는 않으려는 듯 조금 씩 얼굴을 내밀고 내게 다가와 나의 늙음과 비교하려는 모습이 신기하다. 나의 늙음과 비교되는 모습, 어쩌면 많이 닮은 것 같아 더욱 신기하지만, 혹시 늙음 자체가 치약 튜브처럼 힘껏 누르고 짜서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서서히 오래토록 길게 연장되는 성질이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면서 별 의미 없이 붙여진 글제목이 바로 ‘노인과 치약’이다.
새로 사온 치약을 쓰다보면 처음엔 튜브가 너무 빨리 홀쭉해지는 걸 보면서 조금이라도 더 아껴 쓰려고 애쓰게 되는데, 아마도 작아지는 것에도 한계가 있는 건지 모르겠다. 작으면 작을수록 더욱 느리게 작아진다. 오늘 아침에도 치약 튜브를 들었는데 아무리 쓰고 또 써도 내 얼굴처럼 주름살이 늘어가긴 해도 짜면 또 하얀 치약이 작은 얼굴을 내미는 것이 신기하다. 어쩜 노인의 발걸음에 보조를 맞춰 치약 튜브도 속도가 느려지는 성질이 있는 탓인지 모르겠다.
물론 노인에게 삶의 시간은 오히려 갈수록 더 빨라져 60대에는 60마일로, 70이 되면 세월은 70마일로, 80이 되면 80마일의 속도로 나이에 따라 시간이 더더욱 빠르게 흘러가는 것 같아서 늙음의 속도에 모두 아쉬움을 갖게 되는데, 치약 튜브는 늙으면 늙을수록 왜 그리 속도가 느려지듯 오래 가는 것일까? ‘그래, 늙으면 치약 튜브처럼 그렇게 느리게 살자!’ 이런 구호가 나올 법도 하다. 쭈그러진 치약 튜브처럼 아무리 쭈그러진 늙음의 남은 생애라도 치약 튜브처럼 짜고 또 짜서 약하고 작은 삶이라도 오래 더더욱 알차게 살아가면 어떨까 싶다. 때때로 이렇게 다짐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커다란 성과를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늙고 약한 자 속에도 성실한 마음으로 살면 짜낼 것이 비록 적을지라도 더더욱 오래도록 무언가 알찬 것이 스며 나올 것도 같으니 말이다.
특히 구약시대의 선지자라면 우선 머리가 하얗고 얼굴에 주름이 많이 잡힌 나이 많은 노인이었을 거라고 지레짐작하는 건 웬일일까? 대개 그림으로 나타나는 선지자들의 모습은 나이 많은 노인들로 그들의 늙음 자체가 권위 있게 보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하지만, 대선지자라는 예레미야를 향해서 하나님께선 ‘내가 너를 모태에서 짓기도 전에 너를 선택하고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너를 거룩하게 구별해서, 뭇 민족에게 보낼 예언자로 세웠다.’고 말씀하시자, 그는 ‘아닙니다. 주 나의 하나님, 저는 말을 잘 할 줄 모릅니다. 저는 아직 너무나 어립니다(렘1:5-7).’라고 응대한 걸 보아서 그는 적어도 어린아이는 아니더라도 젊었을 때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신약의 대표적 선지자였던 세례자 요한은 주님보다 6개월 먼저 세상에 왔지만, 오히려 주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걸 보면 분명히 그는 새파란 젊은 나이에 그에게 부여된 임무를 마치고 헤롯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 자신의 늙음, 곧 쭈그러진 치약 튜브를 힘껏 짜내어 오래오래 사용한 나 같은 늙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속에 넣어주신 하나님의 뜻만을 일찍 몽땅 짜내어 올곧게 전해주고 세상을 떠난 선지자였다.
하나님의 일엔 젊음과 늙음의 나이차이가 없다. 어린아이 사무엘도, 목동 다윗도 부르셔서 일하게 하셨고, 나이 80세에 부름 받은 모세는 40년간 철저히 종으로 일했다. 노인은 단지 약하기 때문에 대접받는 자리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치약 튜브를 짜듯 모세의 늙음을 짜내어 끝까지 사용하시고, 그의 나이 120세가 되었을 때도 그를 강제로 데려가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마치 몽당연필처럼, 노인의 주름살을 닮은 수명을 다한 치약 튜브처럼 힘껏 짜고 또 짜서 보다 오랫동안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늙음의 지혜를 좀 더 의미 있게 사용하고 흔적도 없이 조용히 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