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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164): 하늘의 만나 이야기
하늘의 만나, 하늘에서 내려온 양식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 해방되어 험한 광야 길에 들어선 후 가나안을 향하는 힘든 노정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먹이시던 일용할 양식을 말한다. 그들이 광야 길을 걸으면서 40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날마다 먹어야 했던 하늘의 양식! 백성들이 스스로 흘린 땀과 수고로 무언가를 얻어서 살아갈 수 없는 환경이었기에, 하나님께서 날마다 하늘로부터 그들에게 육신의 양식으로 내려주시던 선물이 곧 만나였다.
하늘에서 내린 만나는 백성들이 처음 보았을 때, ‘이게 뭐지(What is it?)’라는 말한 데서 따온 이름이다(출16:15). 그들이 그들만의 힘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은 알았지만, 자기들이 무엇을 어떻게 먹고 살지에 대해선 아무도 알 수 없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 모든 백성들에게 똑같은 하늘의 양식, 만나를 내려주셨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의 하루하루의 땅 위에서의 삶을 하늘의 만나로 살아가게 하신 뜻이 과연 무엇일까? 그 백성은 땅에 살아도 결국 하늘의 양식으로 살아야 할 백성임을 알게 하신 것이 아닐까? 처음엔 ‘이게 뭐지?’라고 의문을 던지고, 혹은 신기한 마음으로 그 만나를 먹었겠지만, 똑 같은 만나가 40년간 지속되는 중에 얼마간 같은 음식이 변함없이 지속되자 지겹다며 짜증을 내기도 했고, 고기나 채소가 먹고 싶다고 불평하기 시작하면서 노예로 살던 땅 이집트를 그리워한 걸 보게 된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하게 깨달을 게 한 가지 있다. 변화가 없이 무엇이든 그대로 계속되면 무언가 있어도 없는 것이 되니 결국 인간들에겐 물질의 가난이 생겨나는 것이다. 인간이 실제로 가난을 느끼게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손에 가진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새로운 것이 없어서이고, 시간에 따라 무언가가 자신의 소유가 더 불어나지 않을 때, 항상 가난하다고 생각하고, 무언가를 더 가지려는 탐욕으로 무장하게 된다.
실제로 가난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선 가난을 어떻게 극복케 하셨는지를 생각해 보자. 이스라엘 땅에 가뭄이 들었을 때 사르밧 과부의 집에 양식과 기름이 떨어지자 그 여인은 뒤주에 남아 있는 밀가루 한 줌, 병에 기름 몇 방울로 빵을 구워 마지막 끼니를 나눈 다음에 죽으면 죽으리라고 작정하고 있었을 때(왕상17:8-16), 하나님께선 그 여인의 집에만 엘리야를 보내셔서 내려주신 밀가루와 기름 역시 하늘의 만나였다(눅4:26). 엘리야,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입에 담아 전하며 살아가는 선지자였다. 그것이 그의 생명의 삶이었다. 그렇다. 사르밧 과부 집에 엘리야의 입에 하나님의 말씀, 곧 하늘의 만나를 담아 보내셨다는 걸 알 수 있다.
사르밧 여인의 집에서처럼 하늘의 만나는 때로 누구에겐 밀가루가 되기도 하고, 빵을 굽는 기름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밀가루와 기름이 있어서 사르밧 여인과 그의 아들이 살게 된 것이 아니라, 바로 엘리야를 통해 하나님께서 하늘의 만나를 보내셔서 그들이 살 수 있었다는 걸 깨닫는 것이 하늘의 복음을 가진 자의 영혼의 마음이 아닐까 싶다.
크리스천들이 한 자리에 모여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른 무엇보다도 모두가 함께 하늘의 만나를 먹기 위함이라는 걸 잊지 말자. 하늘의 만나를 먹는 것, 그 자체가 예배라면 그 장소를 아름답고 값진 것으로 꾸미기보다는 광야의 모습을 유지하는 것이 오히려 더 낫지 않을까? 성서를 옆에 두고서도 그 책을 계속해서 읽는 일이 힘든 이유가 무얼까? 아무리 읽어도 이해되지 않는 내용이 너무 많아서 흥미를 잃었기 때문일까? 혹은 자신의 지성 혹은 반듯한(?) 이성으로 생각해 보면 너무 황당한 내용 때문에 거짓처럼 생각돼 자신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아서일까? 백번 양보해서 예배에 참석해서 설교를 듣는 것으로 충분하고 만족하기 때문에 성서를 읽는 것은 시간 낭비라 여겨지기 때문일까? 허나 육신의 양식도 꼭 맛으로 먹는 것이 아니듯이 영이 살기 위해선 하늘의 만나를 먹는 것. 음식은 맛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몸의 건강과 배고픔을 채우기 위함이다. 우선 그렇게 먹고 살아 있어야만 음식의 깊은 맛도 알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