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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388):크리스천 공동체 안에 있는 고독의 문제
‘그래서 나는 늘 주님과 함께 있으므로, 주님께서 내 오른 손을 붙잡아 주십니다(시73:23)’
이것은 아삽의 노래 중 한 구절이다. 같은 시편 끝 절(28)엔 이런 노랫말도 있다.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것이 나에게 복이니 내가 주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고, 주님께서 이루신 모든 일들을 전파하렵니다.’
시73편에서 인용한 이 두 구절만 보면 저자 아삽은 고독이란 말과는 아무 상관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 크리스천들 역시 아삽의 노래와 같은 노래를 부르며 비슷한 환경 가운데서 살아가는 사람들일 수도 있지만, 우리들 가운데서 사라져야 할 고독은 진정 없는 것일까?
세상엔 취미가 무엇인가, 물으면 농담처럼 ‘제 취미는 고독’이라고 정답처럼 당당히 답하는 사람도 있다. 취미가 참 고상하다는 시적 반응도 나오겠지만, 어쩌면 진담이 아니라, 농담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갈수록 더더욱 복잡해지는 사회 속에서 오히려 고독은 늘고 있고, 고독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도 많은 것이 현실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하나님의 창조질서 속엔 사람들을 공동체로 살도록 지으신 것을 보게 된다. 하지만 그 공동체와 함께 하지 않거나 혹은 그 공동체가 무너질 땐 그 공동체는 누구에게든 고독감을 안겨줄 수밖에 없다. 성경엔 공동체 안에서 살도록 ‘서로 서로’, ‘서로 사랑하라(벧전1:22;롬12:10)’,등등. ‘서로’란 표현이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창조질서 가운데엔 이런 말씀이 있다.
‘주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남자가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를 돕는 사람, 곧 그에게 알맞은 짝을 만들어 주겠다(창2:18).” 아담 한 사람의 창조가 곧 아담과 이브의 공동체인 가정의 창조였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 첫 가정이 곧 하나님의 가정(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은 하나로 이뤄진 공동체를 닮은 모습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벧후1:4절에는 세상에선 각자의 정욕 때문에 공동체가 무너지면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도록 하나님의 성품 혹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로 사람을 지으신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유지하고 살아야만 가정이란 공동체도, 크리스천 교회 공동체도 깨지지 않기에 그 안에서 고독을 떠나 살아갈 수가 있다. 공동체가 깨지는 건 그 안에서 개인의 욕심이나 정욕이 드러날 때 가정도 교회도 깨지기 십상이다. 고로 크리스천의 고독은 죄로 말미암아 온다고 말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의 사랑이 부족하다고 느낄 때도 고독을 느낄 수가 있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될 때, 절친을 잃게 될 때, 고독은 어쩌면 정상적일 수가 있다.
하지만 주님을 따르려면 하나님 앞에서도 고독을 느껴야 할 때가 있다. 하나님과의 영적 훈련이 부족해서 느끼는 고독일 수기 있다. 혼자 있는 것(solitude)은 소위 고독(loneliness)과는 다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을 저만치 보내놓으시고, 홀로 하나님께 기도하신 경우와도 같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나 성경을 필사할 땐 공동체보다는 홀로 있는 시간인데도 고독보다는 오히려 영적 경험으로 심령이 풍성해지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가 있다. 크리스천들은 혼자 있어도 사실은 양 무리 중에 있는 공동체 의식을 잃지 않아야 한다. sheep는 단수이든 복수이든 공동체 안에서 같은 하나인 것처럼 크리스천들은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양들이다. 사람 인(人)자 역시 한 사람이 아니라, 아담과 이브처럼 한 몸의 한 공동체로 한 가정을 지칭한다는 걸 잊지 않는다면, 크리스천들의 공동체 의식은 하나님과의 한 가정일 때 우리 가운데서 고독 혹은 고독감을 몰아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