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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418): 모든 피조물의 강약(强弱)과 그 존재 방식 2
피조물의 존재는 지난번 글에서 언급한 '강약관계' 외에 모든 피조물은 나름대로 각기 '그 종류대로' 창조된 그 안에서도 '선후관계(先後關係)'로 존재한다. 모든 피조물에 선후관계가 존재한다는 건 그 어떤 피조물이든 모두가 시간 속에서 선후로 연결돼 있다는 뜻이고, 그 선후엔 좋든 좋지 않든 앞뒤 차이가 존재한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선 자신과 같은 하나님을 존재케 하실 수 없다. 강(强)대 강(强)의 존재 방식은 하나님의 뜻 가운덴 존재치 않는다. 전지전능무소부재(全知全能無所不在) 하신 분이 자신과 같은 존재를 결코 만드실 수가 없다. 만약 만드셨다면, 다른 피조물일 뿐, 하나님, 그분일 수는 없다. 사람은 신들(gods)을 얼마든지 만들지만, 결국 우상을 만들 뿐, 인간이 만든 신(神)들이 하나님과 대등한 자리에 앉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영원히 오직 한 분으로 존재하신다. 자존자 하나님, 그의 피조물은 창조주께 상대적일 수 없다.
창조질서를 살피면 지음 받은 것들이 선후로 질서가 세워진 것을 발견할 수가 있다. 창1:1절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란 선언에서도 하늘, 다른 말로 창공이 먼저 지음 받았고, 땅은 그 뒤에 지음 받았으니 하늘과 땅은 앞뒤 선후관계로 존재한다. 하늘이 먼저이고, 땅은 나중이다. 하늘이 먼저 지음 받았기에 뒤에 지음 받은 땅에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다. 하늘 없이는 그 어디에도 생명이 존재할 수 없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뼈대가 선후관계라는 말이다. 만물의 선후관계는 창조질서의 핵심인 셈이다. 첫째 날 빛의 창조는 이미 존재하던 어둠에 자리를 내주고 빛은 다음 차례라 생각되지만, 첫날의 빛의 창조는 이미 존재하던 어둠 때문에 하나님의 빛의 창조가 먼저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하나님께선 어둠을 깨뜨릴 빛의 창조가 필요하셨다. 빛이 없다면, 모든 생명체의 눈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빛없이 볼 수 있는 눈은 없다.
빛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선 그 빛으로 어둠을 나누셔서 밤과 낮, 하루를 24시간으로 정하셨다(창1:3-5). 시간, 혹은 날은 밤의 어둠과 낮의 밝음으로 선후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그 이후 시간은 둘째 날을 맞았고, 계속해서 마치 강물처럼 하루, 또 다음 하루로 연이어 흘러간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물을 이리저리 바뀌고, 거기에서 생명은 성장이란 삶이 있고, 또한 인간의 타락도 생겨난다. 결국, 시간 속에서 수명의 한계를 맞아 죽음에 이르게 되는 걸 날마다 경험하고 있질 않은가? 시간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은 시간 속에서 수명을 살다가 육체가 묻히는 땅으로 가게 되지만, 존재 방식인 선후가 죽음의 순서와 같지는 않다. 더구나 시간 속에서 시간이 지배하고 있는 모든 것 중에 영원한 것은 없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강조점이 있다면, 시간을 연결해서 영원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이고,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는 아무리 오래 살아도 수명 속에서 죽음을 맛보게 돼 있다.
사실 시간의 장단은 영원에 비할 바 아니다. 시간은 시작이 있으나 죽음으로 끝이 있다. 죽음의 선고를 받고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조차 930년을 살았고, 최장수의 므두셀라의 수명 969세도 영원에 비하면, 단지 눈 깜짝할 한순간일 뿐이다. 시간에 의한 장수는 결국 '수고와 슬픔뿐'이란 고백은 결국 영원한 존재로 지음 받은 인간이 시간에 갇혀 수명 안에서 죽음을 맞되 그 안의 삶은 모세의 기도대로 '천년도 밤의 한 순간'이란 고백이다. 생명의 가치를 논하기 전에 먼저 고달픈 인생길에서 시도 때도 없이 '어찌할꼬!'라는 한숨뿐이지만, 그 수고와 슬픔을 피할 자가 아무도 없다는 건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질서가 첫 사람에 의해 깨졌으니 결국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인 긍휼의 은혜에 의존할 수밖에 다른 방법은 그 어디에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