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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419): 피조물의 창조질서가 진화로 바뀌는가?
특히 한국인들 가운데선 학교나 군대의 선후 관계가 마치 부동의 사회규범인 것처럼 자리 잡고 있어서 선배는 후배를 함부로 대하고, 심지어 자기 종처럼 하대해도 입도 뻥긋 못 하고 당연시 받아들이는 경우가 흔하다. 더구나 제대 후에도 군대 내의 상관과 부하의 관계처럼 엄격하게 그 상하 관계를 지키려는 것을 볼 때마다,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일지라도 마음이 편치 않은 경우가 많다. 각자는 자기 부모로부터 세상에 태어났는데, 부모에게서 태어남이 다른 사람보다 조금 늦었다고 해서 그 때문에 왜 자기 부모와 상관없는 엉뚱한 사람이 자신을 마치 종처럼 대하는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할 때가 많다.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나타난 선후 관계는 무생물의 관계라도 서로의 존재 의미가 다르고, 더구나 생명 관계라면 선후 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피조물이 각각 저절로 생긴 것이라면 스스로 질서가 세워지긴 어렵겠지만, 하나님의 창조로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그 안에 선후 관계라는 질서가 있고, 그 질서가 무너지면 결국 혼란이 야기돼 피조물들이 서로 더불어 살아갈 수가 없다.
생명체의 생명 관계는 높낮이의 계급으로 나눌 수 없게 돼 있다. 물론 생명체의 신체 부위가 객관적 면에서 중요성의 차이야 다를 수는 있지만, 질병 치료면에선 그 중요성이 달라져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왼손잡이이니 오른손은 별로 중요치 않아',라며 오른손을 소홀히 대할 수 있겠는가? 우리 몸의 어느 한 부분도 소홀히 다뤄도 괜찮고, 다른 어느 부분을 더 중요시해야 한다고 말할 사람은 없다. 새끼발가락 하나가 없어도 걷기에 불편하고, 새끼손가락 하나 없으면 손아귀의 힘이 약해져서 물건을 쥘 때 불편해진다. 우리의 육체를 계급처럼 상하 혹은 선후, 혹은 강약으로 나누어 귀한 것, 하찮은 것으로 구분할 수 없다.
만약 하나님께서 먼저 빛의 창조로 어둠을 밝히지 않으셨다면, 사실상 다음의 창조 사역이 진행될 수 있었겠는가? 어둠 속에선 피조물 존재의 행방조차 알 수가 없으니 창조 사역이 무슨 의미가 있고, 피조물의 존재 자체를 감지할 수 없으니 하나님의 창조역사 진행이 다시는 계속될 수 없었을뿐더러 어둠 속에서 무엇이 어디 있는지 그 행방조차 알 길조차 없었을 터.
그렇다. 하나님의 빛의 창조 이후 창공이 지음 받아 펼쳐지고 동시에 물과 흙을 분리해 바다와 마른 땅이 드러나게 하시고, 새로 지음 받은 땅에선 씨 맺는 열매를 비롯해 여러 가지 식물들, 곧 생명을 가진 실체가 땅에서 자라나기 시작했다(창1:12). 새들이나 동물들에게 먹거리가 될 수 있는 기본적인 열매나 씨앗들이 땅에서 자라나게 하셨다. 이렇게 우리 인간을 비롯해 모든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지구가 마치 생명체처럼 생겨난 것. 지구가 진화 때문에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는 땅이 되는데 장구한 세월이 필요했더라면, 먼저 생긴 생명체가 어떻게 생명을 유지할 수가 있었겠는가? 진화는 더 좋아지는 편으로 발전하지 않는다. 다만 시간 속에서 망가지고 사라지는 장면이 분명하니 좋은 쪽으로의 진화를 고집할 수가 없다. 시간 속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진화한다면, 그 어디에도 완전한 것은 존재할 수가 없다. 완전한 새 차라도 시간이 지나면 낡아지고 고장이 나게 마련, 더 좋아지지는 않듯이 모든 피조물은 시간 속에서 서서히 혹은 생각보다 빨리 망가지게 마련이다. 퇴보가 진화인가? 아니다. 시간 속에선 피조물의 진화는 없다. 어린아이가 성년이 돼 나아진 것이 진화인가? 아니다. 다만 퇴화의 과정에 다른 부분이 끼어들었을 뿐이다. 오래된 것이 오랜 시간이 지나며 좋아졌기에 비싼 값에 팔리는 것이 아니라, 오래돼 희귀한 골통품이 되었기에 그것도 사람의 선호도에 따라서 값이 달라졌을 뿐이다. 골통품이 진화해, 더 좋아져서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은 것은 결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