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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425): 시니어의 삶의 보람찬 여정을 위하여 3
변화의 주체로서의 하나님<1>
변화의 주체로서의 하나님을 말하면, 우선 '영원히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이 연상돼 먼저 하나님의 변화란 말에 의구심이 생기지 않을까 싶다. 더구나 하나님의 행동 패턴의 키가 바로 먼저 약속하신 후, 그 약속을 이루시는 분으로서 영원히 변치 않으시는 분, 여기에 무게가 실리는 게 사실이다. 약속하시고, 그 약속들을 책에 기록해 두툼한 '약속의 책', 곧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께서 그 약속들을 마음대로 변경하신다면, 어찌 우리가, 아니 모든 피조물이 변화무쌍한 하나님을 따라 살 수가 있겠는가? 곧 길을 잃고 어둠에 빠져버리지 않겠는가?
하지만, 커다란 전제가 있다.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시고, 그 외에 사람을 비롯한 모든 존재는 지음 받은 피조물이다. 한데 하나님의 모든 약속과 계획을 깨뜨리고 헌신째처럼 버린 존재는 지음 받은 모든 피조물이다. 그 주체, 곧 만물의 영장이 곧 사람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창조질서, 곧 생명질서를 깨뜨린 장본인이 사람이란 말이다. 결국,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서 자행자지하며 계속해서 제멋대로 살아가는 걸 보시면서 하나님의 원칙엔 변함이 없더라도 그것을 이루는 방법이 시간 속에선 변화가 필요할 때도 있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변함없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노래를 들려주고 있다. 하나님의 변화엔 다음과 같은 단서가 첨부돼 있음을 노래로 표현한 것이다. 곧 '주님은 오직 당신을 경외하는 사람과 당신의 한결같은 사랑을 기다리는 사람을 좋아하신다(시147:11).' 하나님께선 피조물로부터 경외를 받으실 창조주이신 것과 모든 것들이 변하더라도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은 결코 변함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그 사랑에 소망을 가지라는 노래이다. 고난과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있더라도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에 소망을 가지라고 격려하신다. 한결같은 사랑이란 곧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이다. 어쩌면 그 사랑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긍휼의 사람이다. 죄인, 하나님을 떠난 인간을 향한 사랑이 곧 긍휼이다. 불쌍히 여기심에 변화가 없다는 뜻이다. 우리 시니어의 삶을 살펴보면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변화돼 원형을 잃은 자의 삶을 통해 달라진 면이 있다 해도, 또 한 편으론 더 나은 방향으로도 다듬어진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주체가 되어 나의 삶의 태도를 바꾸기보다는 내가 손해를 보는 선한 뜻을 위하여 자신을 바꾸며 살아왔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다면, 시니어의 삶 속에 늙음만 있을 뿐, 좋은 변화는 있을 수 없다고 누가 단언해 주장할 수가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조성하시고, 그들이 자신들을 위해 왕을 세우는 걸 절대로 원치 않으셨지만, 사사 시대를 거치면서 백성들의 아우성을 들으시고, 사무엘을 통해 왕을 세우도록 허락하신 걸 보게 된다. 어쩌면 하나님의 왕 되심을 부정하는 백성들의 원망을 외면치 않으시고, 왕을 세우도록 하시되 그들의 눈에 만족할만한 사울을 세우도록 하셨다. 이스라엘의 왕조는 철저히 무너지고 주님께서 땅 위에 인자로 오시기 전까지 400년간의 암흑기를 맞았다. 왕조의 패망도 왕을 세우도록 허락하신 하나님의 책임이라고 비난한 자들이 있지만, 인간은 이미 선악의 지식으로 무장했기에 자기들이 좋아하는 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그 어느 것도 만족하지 않을 것을 하나님께서 미리 아셨다. 그 때문에 하나님께선 만왕의 왕 되심을 절대 포기치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왕권을 포기치 않으셨다는 말은 하나님의 약속 영원성에 변함이 없다는 약속의 보장이다. 그 때문에 하나님께선 긍휼의 사랑으로 기다리고 있으니,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면 긍휼로 받아주시겠다고 다짐하신 것. 그 때문에 시니어의 위치란 하나님의 영원성을 후손들에게 일깨워줄 주체인 셈이다.
변화의 주체로서의 하나님<1>
변화의 주체로서의 하나님을 말하면, 우선 '영원히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이 연상돼 먼저 하나님의 변화란 말에 의구심이 생기지 않을까 싶다. 더구나 하나님의 행동 패턴의 키가 바로 먼저 약속하신 후, 그 약속을 이루시는 분으로서 영원히 변치 않으시는 분, 여기에 무게가 실리는 게 사실이다. 약속하시고, 그 약속들을 책에 기록해 두툼한 '약속의 책', 곧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께서 그 약속들을 마음대로 변경하신다면, 어찌 우리가, 아니 모든 피조물이 변화무쌍한 하나님을 따라 살 수가 있겠는가? 곧 길을 잃고 어둠에 빠져버리지 않겠는가?
하지만, 커다란 전제가 있다.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시고, 그 외에 사람을 비롯한 모든 존재는 지음 받은 피조물이다. 한데 하나님의 모든 약속과 계획을 깨뜨리고 헌신째처럼 버린 존재는 지음 받은 모든 피조물이다. 그 주체, 곧 만물의 영장이 곧 사람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창조질서, 곧 생명질서를 깨뜨린 장본인이 사람이란 말이다. 결국,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서 자행자지하며 계속해서 제멋대로 살아가는 걸 보시면서 하나님의 원칙엔 변함이 없더라도 그것을 이루는 방법이 시간 속에선 변화가 필요할 때도 있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변함없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노래를 들려주고 있다. 하나님의 변화엔 다음과 같은 단서가 첨부돼 있음을 노래로 표현한 것이다. 곧 '주님은 오직 당신을 경외하는 사람과 당신의 한결같은 사랑을 기다리는 사람을 좋아하신다(시147:11).' 하나님께선 피조물로부터 경외를 받으실 창조주이신 것과 모든 것들이 변하더라도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은 결코 변함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그 사랑에 소망을 가지라는 노래이다. 고난과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있더라도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에 소망을 가지라고 격려하신다. 한결같은 사랑이란 곧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이다. 어쩌면 그 사랑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긍휼의 사람이다. 죄인, 하나님을 떠난 인간을 향한 사랑이 곧 긍휼이다. 불쌍히 여기심에 변화가 없다는 뜻이다. 우리 시니어의 삶을 살펴보면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변화돼 원형을 잃은 자의 삶을 통해 달라진 면이 있다 해도, 또 한 편으론 더 나은 방향으로도 다듬어진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주체가 되어 나의 삶의 태도를 바꾸기보다는 내가 손해를 보는 선한 뜻을 위하여 자신을 바꾸며 살아왔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다면, 시니어의 삶 속에 늙음만 있을 뿐, 좋은 변화는 있을 수 없다고 누가 단언해 주장할 수가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조성하시고, 그들이 자신들을 위해 왕을 세우는 걸 절대로 원치 않으셨지만, 사사 시대를 거치면서 백성들의 아우성을 들으시고, 사무엘을 통해 왕을 세우도록 허락하신 걸 보게 된다. 어쩌면 하나님의 왕 되심을 부정하는 백성들의 원망을 외면치 않으시고, 왕을 세우도록 하시되 그들의 눈에 만족할만한 사울을 세우도록 하셨다. 이스라엘의 왕조는 철저히 무너지고 주님께서 땅 위에 인자로 오시기 전까지 400년간의 암흑기를 맞았다. 왕조의 패망도 왕을 세우도록 허락하신 하나님의 책임이라고 비난한 자들이 있지만, 인간은 이미 선악의 지식으로 무장했기에 자기들이 좋아하는 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그 어느 것도 만족하지 않을 것을 하나님께서 미리 아셨다. 그 때문에 하나님께선 만왕의 왕 되심을 절대 포기치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왕권을 포기치 않으셨다는 말은 하나님의 약속 영원성에 변함이 없다는 약속의 보장이다. 그 때문에 하나님께선 긍휼의 사랑으로 기다리고 있으니,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면 긍휼로 받아주시겠다고 다짐하신 것. 그 때문에 시니어의 위치란 하나님의 영원성을 후손들에게 일깨워줄 주체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