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원목사와 함께 목회하는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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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관리자 2024.02.10 20:48 Views : 166

울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울어야 할 일이 생긴 것은 아닌데 마음 깊은 곳에 비구름이 모입니다. 캄캄한 동굴 속에 들어가 있는 것도 아니며, 깊은 물속 허우적거리는 것도 아닌데, 그냥 한숨 섞인 눈물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오지 않는 어머니 기다림에 가느다란 장딴지가 아픈 것도 아니고, 한 쪽 날개 부러진 새의 날지 못한 갑갑함이 있는 것도 아닌데, 살다 보면 눈물이 솟구쳐 오를 때가 있습니다. 석양 노을 타고 슬며시 찾아든 노스탤지어가 아니고, 눈물 아니면 소화 시킬 수 없는 애잔한 아픔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런데, 울고 싶다면, 그건 자연스러운,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가는 길이고, 사람이 사람으로 되어가는 길이라고 이야기하겠습니다. 

 

고약한 사람을 말할 때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라 합니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즐거움을 함께 즐거워하지 못합니다. 마주 잡는 손 악수는 몇 번이라도 하겠지만, 웃음을 만나며 눈물을 보듬는 ‘공감’과는 거리가 먼 인생입니다. 악수는 손과 손이 만나는 것이니 원수라도 할 수 있지만, 공감은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일이니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겁니다. 애당초 ‘공감지수’니 뭐니 말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눈물을 알고 다른 사람의 웃음을 알 수 있도록 가르치고, 그 길이 비로소 사람 되는 길임을 두고두고 알려야 했습니다. 

 

예레미야를 ‘눈물의 선지자’라 부르는데, ‘눈물의 신학’이라는 영역을 만들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학문이 신학이라면, 신학자는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섭리를 알뿐 아니라, 하나님의 미소를 알고 눈물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신학이 머리로만 하는 학문이 아니라는 것과 교회 및 우리 신앙은 하나님의 다양한 성품 위에 세워져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눈물 모르는 지식은 판단과 정죄의 기준으로 전락하고, 가슴 없는 신학은 자칫 하늘을 찌르는 거룩한 교만으로 옷 입습니다. 신학이 학문인 것은 분명한데, 목회로 이어지는 신학은, 반드시 가슴으로 해야만 합니다. 

 

아픈 사람에게 아픈 사람의 보폭으로 맞추어 걸어주고, 실패하고 좌절한 사람에게 ‘힘들었지’라는 말이 앞서면 됩니다. 인생 짐 버거운 사람에게 작은 것 하나라도 거들어주고, 후회의 거친 숨이 담 넘는 사람에게 꼭 잘하지 않아도 되는 게 인생이라며 손잡아 주면 됩니다. 처방과 대책, 분석과 논리, 권면과 주장은 그다음이어도 충분합니다. 괜찮다 말해주고, 기다렸다 안아주며, 다시 해보자 격려해 주면 됩니다. 어느 자리에 설 지 망설일 때 곁 자리 내어주고 손잡아 이끌어주면 됩니다. 울고 싶을 때에 그 눈물의 의미를 알아주고, 웃고 싶을 때 그 웃음의 깊이를 더해주면 됩니다. 

 

울고 싶은 때가 있다 했지요? 사람은 사랑해서 울고, 고마워서 울며, 미안해서 웁니다. 사람은 그리워서 울고, 힘들어서 울며, 허전해서 웁니다. 사람은 억울해서 울고, 답답해서 울며, 애잔해서 웁니다. 그 사람 안에 들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 사랑, 고마움, 미안함, 그리움, 힘듦, 허전함, 억울함, 답답함, 애잔함…. 어떤 것인지, 그 사람 향한 마음의 귀로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그곳에 날 위해 자기를 비우신 주님이 계실 겁니다.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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