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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430): 시니어의 삶의 보람찬 여정을 위하여! 5
넓은 시야를 가진 시니어들!
미래를 보는 눈은 젊은이들만의 소유도, 그들만의 전문영역도 아니다. 과거를 살아온 시니어들이 더욱더 정확하게 미래를 볼 수 있지 않을까 싶기에 하는 말이다. 이것은 단순히 젊은이와 시니어의 비교우위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시니어들을 쉽게 밀어내는 요즈음의 젊은이들보다는 과거를 아는 바탕 위에서 미래를 바르게 내다볼 줄 알기 때문이기에 지나가듯 한 번 해본 말이다. 시니어이기에 시니어를 편드는 건 더더욱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어린아이로 태어나셔서 30여 세의 젊음으로 십자가에 달려 고통 가운데서 돌아가신 우리의 구세주이다. 시간 속에 태어나 30대의 젊음으로 구속의 일을 감당하셨다는 말이다. ‘그래, 젊음이 아니면, 감당할 수 없던 일이야!’,라는 말에도 일리가 있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으로 구속의 일을 감당했다면, 그 형장의 모습이 참아 눈뜨고 바라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 너무나도 약한 어린양의 죽음이었다.
하지만 주님은 영원을 살고 계신 영원한 젊음이셨기에 그 한 분 안에 만국 백성의 모든 과거와 미래를 한 몸에 모두 담고 사셨다. 시간 속에서 태어나 969세의 수명을 살고 죽은 므두셀라도 주님의 영원성 앞에 빗대어 말할 수가 없다. 그가 그저 오래 살았어라고 말할 수 있었을는지 모른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나이도 헤아리지 못할 만큼 살았고, 지금의 표현으로는 그는 시니어 중의 시니어, 아니, 시니어라고 말해서 우리 같은 나이의 사람인 양 말해선 안 될 만큼 오랜 수명을 살았다.
오는 우리 교회의 설교 말씀을 비추어 보면 므두셀라는 하나님 앞에서 오랜 세월을 살았지만, 하나님과의 동행이라는 스토리는 하나도 없다. 서정시 한 편도 없고, 우리가 아무리 그 말씀을 뒤져보아도 그에게서 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한 편도 없다.
오늘의 시니어들도 너무나 의외라고 말할 만큼 오랜 수명을 살고 있지만, 실제로 남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없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끼며 남들이 들어 놀랠만한 이야기는 아니더라도 지금부터라고 주님과 더불어 살아가며 빚어지는 희로애락의 이야기로 ‘서정시도 써보고’,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분의 뜻을 깨달아 다른 사람에게도 알려줄 만한 ‘서사시도 써보고’, 우리의 삶의 순간들이 하나하나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이야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다짐을 해보았다. 그래도 올해 초엔 우리 교회 안에서 한 젊은이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거듭난 기쁨의 이야기를 들려준 기회가 주어졌기에 그를 오랫동안 옥바라지하며 주님의 사랑을 쏟아부어 그를 어두움에서 빛으로 끌어낸 한 시니어의 눈물겨운 헌신은 모든 시니어에게 본보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들과 친구가 돼주셨듯이 시니어야말로 시니어에겐 물론 젊은이에게도 친구가 돼줄 수 있는 적합한 자가 아니겠나 싶다. 실제로 시니어들이야말로 손자와도 친구가 돼줄 수 있지 않은가? 이처럼 넓은 시야를 가진 시니어라면 애어른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친구가 돼 넓은 시야를 가진 소망의 끈이 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