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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삶과 생각 모닥불 앞에서 떠오르는 낱말들 1
1. 허무에 관한 묵상
칼럼/ 삶과 생각을 개설하면서 무엇보다 우리들의 생각의 틀을 바꿀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담았다. 이 칼럼을 읽는 독자라면 우선 창간호의 첫 주제가 어찌 허무일까, 라는 의문을 먼저 떠올리는 독자가 있을 것 같다. 본 칼럼을 통해 인생의 의미를 부여하려고 삶과 생각을 묶어보니 내 머릿속에서 허무가 먼저 떠올랐다.
하지만, 실상 나는 일상의 삶에서 허무를 느낄 만큼, 혹은 그것을 노래할 만큼 한가롭게 살아본 기억이 없다. 하지만, 나보다 훨씬 더 좋은 환경에서 사는 사람들 사이에선 허무를 말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 어떤 이는 취미가 무어냐고 물으면, 장난기가 섞인 어투로 ‘허무’라고 단답형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뜻밖이란 생각도 들었지만, 고뇌에 찬 사람처럼 보이면, 오히려 고상해 보이기도 하고, 지적 풍모까지 풍겨 나오면서 그런 사람들이 의미 있게 보여서 그럴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쨌든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 앞에서라면 서로 가볍게 나눠도 괜찮은 주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되고, 더구나 요즈음의 혼란스러운 세상이 허무를 조장하고 있다는 나름의 판단도 한몫한 것 같기도 하다.
의미를 부여하는 삶
허무를 말하기 전에 인생은 일상의 삶 자체가 매사에 의미가 요구되는 걸음걸이라는 전제하에선 자연스럽게 허무가 먼저 떠오른다. 앞서 허무를 노래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했지만, 허무는 노래할 만큼의 철학적 명제가 아니다. 더구나 허무란 우리들의 마음이나 감정에 좌우되는 문제가 아니라, 자신들이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고 살았던 것에 대한 실망감이 일어날 때 허무하다고 말한다. 어떤 사물에 대해서 자신의 한계 속에서도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면, 허무가 일어나진 않는다. 진정 허무를 이야기하려면 적어도 어느 정도의 세월을 산 사람이어야 한다. 아직 삶의 경험도 미숙한 어린아이가 허무를 말한다면, 그것은 어울리지 않는 헛소리이다. 적어도 솔로몬만큼이나 호화로운 삶, 육체의 쾌감에 붙잡혀 여인들 속에 붙잡혀 살던 삶, 왕의 권력을 풍성하게 누렸던 삶이라면, 인생의 허무를 말할 수가 있다.
허무의 근거
솔로몬의 삶의 형태를 살펴보면, 그가 누린 모든 것들에 대해 허무를 읊조린 걸 보면, 그런 모든 것에 관한 허무의 부르짖음은 한갓 사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등장한다. 솔로몬의 허무를 들으면서 어떤 이는 그가 누린 어느 작은 한 부분이라도 누릴 수 있었다면, 한이 없었을 덴데, 라며 그를 부러워할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결국, 허무도 상대적이란 말이 나올 수밖에 없으니 허무의 근거와 모호해진다.
솔로몬의 허무는 그가 육적으로, 혹은 왕으로 누리고 있는 모든 삶을 영적인 눈으로 보았을 때 나온 허무처럼 보인다. 자기 육안으로 보고 누렸던 삶을 하나님의 영원한 눈, 영적인 눈에 비쳐 보았을 때, 모든 게 허무로 생각되었지 싶다. 우린 흔히 시든 나뭇잎을 보고서, 이른 봄에 핀 꽃들이 빨리 시들어 떨어졌다고 해서 허무를, 화무십일홍을 허무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영원한 진리에 기초해서, 거기에 비추어 모든 다른 세상적인 것들에 대한 허무를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영원한 진리로 돌아가려는 몸부림이 뒤따라야 한다. 이것이 일상의 허무를 떨쳐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의지하는 삶이란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