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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487): 하나님, 그 말씀의 본질을 찾아서
‘내가 인자와 공의를 노래하겠나이다(시101:1).’
다윗의 시편 101:1의 우리말 번역엔 ‘인자와 공의’로 번역하기도 하고, 인자를 알기 쉬운 ‘사랑’으로, ‘공의’를 ‘정의’로 번역한 성경도 있다. 그러나 영역 성경(NKJV)은 ‘mercy and justice’를 하나로 묶어 번역해 놓은 것을 사실을 보면, 우리말의 사랑이나 인자를 영어 성경에선 긍휼이란 뜻의 ‘mercy’로 번역해 부모가 자녀를 향한 불쌍히 여기심의 보다 깊은 사랑으로 표현한 걸 보게 된다. 어머니의 사랑을 기리는 노래 가사를 보면,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오’라고 말하고 있는 걸 보면, 어머니의 넓은 사랑은 결국 하나님의 긍휼에 빗댄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지 않은가?
결국, 긍휼과 인자는 같은 뜻이고, 사랑은 긍휼함이나 인자를 보다 알기 쉬운 깊은 사랑으로 표현한 것으로 이해하면 되지만, 다윗이 자신의 시편에서 ‘긍휼과 공의’를 묶어놓은 깊은 뜻을 더욱 잘 살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내가 언젠가 긍휼을 말하면서 피난살이 중에 밭에서 일하고 집에 온 어느 엄마가 흙 마당에서 혼자서 코를 질질 흘리며 놀고 있는 자기 아들을 보고, 엄마가 그를 안으면서 ‘아이고, 불쌍한 내 새끼’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데, 여기서 엄마가 말한 ‘불쌍한 내 새끼’라는 표현보다 진한 엄마의 사랑을 달리 표현할 길은 없을 거로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죄인을 향한 긍휼함이 하나님 아버지의 자식을 향한 애틋한 진한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누구의 사랑, 그 어떤 사랑을 강조할 적엔 다른 그 무엇보다 크다는 의미에서 공의 혹은 정의를 무시해버릴 만큼 강조하는 걸 쉽게 볼 수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의 사랑을 아무리 강조하고 싶더라도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무시해버리고서도 긍휼의 사랑이 그대로 존속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우선 다윗이 그의 시편에 ‘긍휼과 공의’를 하나로 묶어놓은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의를 깨뜨리고서도 존재하는 긍휼, 곧 사랑은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는 긍휼의 사랑이지만, 그렇다고 공의를 무시하고 사랑하실 수는 없다는 사실에 관한 바른 이해가 먼저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 어떤 가정이든지, 특히 한국인의 가정에서 자녀들을 향한 부모의 사랑을 희생시키면서까지 하나님의 요구를 우선시할 사람이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자. 물론 성경에서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요구에 순전히 응한 사실을 믿음으로 이해하고 있더라도, 막상 보통 가정에서 부모가 독자 아들을 아무런 부정적인 마음의 표현도 없이 하나님께 제물로 내놓을 가정이 과연 가능할지 생각해 보자. 즉 우리는 공의가 감정에 의해서 좌우되기가 쉬우므로, 더구나 공의보다는 감정이 훨씬 더 강하기 때문에, 감정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이기고서도 의기양양, 당연시할 수가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긍휼은 아들을 죄인들을 구하시려고 십자가의 죽음에 내놓아 공의도 이루시고, 안타깝기 그지없는 마음의 감정도 넉넉히 이겨내신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께선 긍휼을 공의와 더불어 이루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