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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25): 기쁨과 슬픔<1>
기쁨 혹은 슬픔을 따로 나누어 분명히 말하지 않고, 왜 「기쁨과 슬픔」을 한 짝으로 묶어 제목을 삼았을까? 더구나 기쁜 성탄을 방금 지나왔는데 말이다. 하지만, 기쁨의 뿌리는 여러 가지이지만, 슬픔의 뿌리는 기쁨에서 비롯된 것이란 생각 때문이다. 기쁨이 없었다면 슬픔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다. 그래서 기쁨이 사라지면 그것이 곧 슬픔이다. 슬픔을 원치 않더라도 기쁨을 누리지 못하면 그가 누구이든 슬픔 가운데 살아가게 된다. 그래서 기쁨과 슬픔은 동전의 양면이요 모두 실체이다. 기쁨을 기초해서 슬픔을 말하는 것, 물론 슬픔을 극복한 다음에 오는 기쁨도 있지만, 고난을 극복한 후의 기쁨은 처음에 잃었던 기쁨과는 차원이 다른 기쁨이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에게 기쁨이 먼저였고, 그 기쁨을 잃은 순간 슬픔이 그들을 삼켰다. 슬픔은 한 순간에 기쁨을 몰아낼 수 있어도 기쁨은 아무리 크더라도 슬픔을 쉽게 떨쳐내지 못한다. 기쁨보다는 슬픔이 훨씬 더 오래 지속되면서 큰 고통을 안겨준다. 물론 슬픔이 기쁨보다 더 오래 지속되는 것이 좋다는 뜻이 아니라, 좋은 게 항상 좋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솔로몬이 왕으로서 그가 권세와 부와 지혜와 수많은 여인들을 모두 자신의 것들처럼 누렸던 오랜 세월 속에서의 그의 모든 기쁨과 행복들을 모두 하나로 만들어서 결론적으로 선언한 말이 바로 ‘헛되고 헛되다.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전1:2).’이다. 이렇게 거듭 강조해서 한 마디로 허무라 결론지었다. 그가 모든 것들을 가지고 누렸던 기쁨과 행복이 결국 ‘허무’라고 한 마디로 요약한 고백이다.
누가 ‘나는 솔로몬의 정의에 동의할 수 없다.’라고 담대히 말할 수 있을까? 솔로몬이 누린 것은 오늘의 우리로선 감히 누릴 꿈도 꿀 수 없을 만큼 크고 강하고 풍성했는데, 우리는 아직도 그 수준에 이르지 못했으니 그렇게 누려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고 말할 텐가? 그래도 한 번 누리고 싶다고 말할 텐가? 진정 솔로몬이 말하는 허무의 의미가 무엇인가? 우리말의 번역은 반복해서 ‘헛되다.’를 다섯 번이나 강조하고 있지만, NKJV의 영역 본을 보면, ‘Vanity of vanities’로 두 번 강조하고, ‘all is vanity(모든 것이 헛되다).’라고 표기하고 있다. ‘허무들 중의 허무’라는 말은 ‘모든 것이 허무하다.’를 최상급으로 강조한 표현이다.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비교급이나 최상급과 같은 표현을 잘 사용하지 않기에 다른 허무한 것들과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허무를 그렇게 표현했다. '왕들 중의 왕(the King of kings)'과 같은 표현인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이시라고 말할 적에 다른 왕들과 비교해서 그들 중의 한 분으로 최고라는 의미가 아니라, 다른 왕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우월하신 왕이시란 뜻이다. ‘허무들 중의 허무’도 다른 허무들과는 전혀 다른 독립된 극한의 허무를 말한다. 허무라고 번역된 ‘vanity’는 우리말로는 ‘목숨(a breath)’ 혹은 ‘거품(vapor)’이란 뜻이다. 목숨이 한 번 숨 쉬는 것처럼 빨리 지나가거나 거품처럼 단숨에 사라져버린다는 뜻이다. 전1;14절에선 빨리 사라진다는 표현을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뭔가 움켜쥔 것 같은데 손을 펴면 금이 간 손바닥 뿐, 그걸 허무라고 말한 것. 자기가 손에 쥐고 있는 것에 무언가 의미를 부여하려고 해도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기에 허무이다. 에덴에서 인간은 영원에서 시간의 수명으로 자리바꿈을 했다. 그들 스스로 영원하신 하나님을 떠나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순간의 시간 속에 사로잡힌 것, 거기서 허무가 시작됐다. 하나님의 영원을 떠나면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허무에 굴복한다. 결국 허무의 슬픔을 떨치고 기쁨을 되찾는 유일한 길은 시간에 붙잡히지 않고, 하나님의 영원에 안기는 것이다. 그 일을 위해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슬픔과 허무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셨다. 허무라는 슬픔, 우리가 극복하기엔 너무나 크고 무겁기에 주님께서 대신 지셨다. 기쁨의 회복을 위해서!<우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