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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26): 기쁨과 슬픔<2>
일상의 다반사이긴 하지만, 혹시 기쁨을 잃었을 때라도 슬픔만은 나를 찾지 않고 피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살아갈 수가 있다. 하지만 슬픔이 없다면 잃은 기쁨을 다시 회복하기 어렵다. 슬픔은 기쁨을 회복시키려는 촉매제이다. 그래서 다시 강조하지만, 기쁨과 슬픔은 항상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싶다.
구약성서 가운데 슬픔의 노래인 애가(哀歌)가 기록돼 있는 것은 자신 혹은 가정, 혹은 국가가 겪는 슬픔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선 무언가를 가르치시고 싶으셨기 때문이다. 물론 시편에서도 시인들이 슬픔을 토로하는 경우가 많지만, 애가의 저자 예레미야를 눈물의 선지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의 슬픔은 그의 약함에 초점을 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꿔놓는데 그의 슬픔이 중요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의 종의 눈물이 하나님께 필요하다는 선언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 주님께서 땅위에 계실 때 기뻐서 웃으신 경우는 없지만, 눈물을 흘리시고 슬퍼하신 경우가 있다. 나사로 무덤 앞에서 우셨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셔서 그와 그의 누이들과 주변의 사람들에게조차 주어졌던 슬픔이 기쁨으로 변했던 걸 보게 된다(요11:32-35). 예레미야선지의 슬픔의 노래 역시 우리에게 슬픔이 무엇인지를 알고 거기서 주저앉지 말고 기쁨을 회복하기를 바란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하신 바라 믿는다.
우리 사회에선 누가 울면 울보라고 핀잔을 주거나 바보로 여기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누가 슬퍼서 운다면, 그가 부끄러워할 일도 아니고, 남들이 감히 무시해버릴 일도 아니다. 야곱은 자기 아들 요셉이 짐승에게 잡아먹혔다는 다른 아들들의 거짓말에 속아 오랜 세월 그는 울고 또 울었다(창37:34-35). 야곱의 슬픔은 그가 죽은 줄 알았던 아들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에 올라 있는 것을 보면서 더할 수 없는 큰 기쁨이 회복되었을 수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들 70명이 이집트로 건너가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민족이 형성된 걸 보게 된다. 야곱의 눈물의 씨앗, 아니 요셉의 눈물이 그 가정에 그토록 풍성한 기쁨의 열매를 안긴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대역사가 성취되었으니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그 창조 사역은 모두 하나님께서 좋아하신 선이었고, 하나님의 기쁨이었다. 그러나 그 질서를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기쁨을 슬픔으로 바꿔버린 자는 맨 나중에 지음 받은 첫 사람 인간이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는 하나님의 기쁨을 회복시키시려는 역사이다. 하나님의 기쁨이 회복되는 것이 하늘의 영광이고, 땅의 평화이다. 우리가 기쁨을 누리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의 회복이 회복되는 것이 하나님의 구속의 목표이다. 하나님의 기쁨이 회복된다는 건 깨뜨려진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회복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는 걸 일컬어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라고 노래했을까? 하나님과 분리된 인간에겐 기쁨도 평화도 진정 언감생심, 불가능한 일이다. 오직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셔야만 땅엔 평화가 임하게 돼 있다. 땅에 평화가 임해야만 사람들에게도 기쁨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땅위에 오심으로 인한 하나님의 기쁨의 회복이기에 사람들에게도 기쁨이 회복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기쁨이 회복되어야만 온 천지에 기쁨과 평화가 임한다는 말이다.
이제 시간 속에서 혹은 달력의 숫자표기로서는 금년의 기쁜 성탄은 지나갔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슬픔을 안겨주지 않아야 한다. 기쁜 성탄은 진정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영원한 약속의 임마누엘이시기 때문이다<우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