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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27): 평화의 비둘기의 날개 없는 추락과 또 다른 비상
-배, 바다, 물고기와 얽힌 요나의 이야기-
새해 첫날에 요나의 부활생명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어린아이를 위한 동화 같지만, 심오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복음이 담긴 약속의 선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선 자신의 평화의 복음을 그 비둘기 입에 물려서 동쪽의 이방 땅 시리아의 수도 니느웨로 날려 보냈는데, 그 비둘기가 정반대 서쪽 다시스 곧 지금의 스페인 쪽으로 방향을 돌려서 하나님께서 결코 원치 않으시는 불순종의 길을 택해 날았다. 사실 요나의 이름의 뜻이 비둘기로 평화의 상징인데 그가 평화의 메신저의 길을 버리고, 다시스로 가는 배에 내려앉았다. 평화의 비둘기가 자기 날개를 스스로 접고 스스로의 안전을 위해 배에 내려앉았다. 물론 비둘기가 배 갑판에 앉아 쉴 수는 있지만, 그는 갑판에 머물지 않고, 배 밑창으로 내려가는 기인한 행동으로 이어졌다.
하늘을 날아야 할 비둘기가 배 밑창까지 내려가자 그가 날던 하늘이 노한 듯이 폭풍이 그가 탄 배를 휘몰아쳤다. 결국 그로 인해 히브리인이라는 그의 정체가 드러났고, 마침내 바다를 잠재우기 위해 그가 던져지기를 바라서 바닷물 속에 던져졌지만, 뱃사람들은 오히려 그를 죽게 만들었다면서 하나님께 희생제를 드린 걸 보게 된다. 아무튼 배 밑창으로 내려갔다가 그가 다시 바다 밑으로 더 깊이 던져진 것, 그는 계속해서 더더욱 밑으로 추락했다. 하나님의 종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했을 때 얼마나 깊이 더 추락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그 때 하나님께선 큰 물고기를 보내셨다. 물론 그를 큰 고기 등에 태워서 육지에 내려주게 하지 않으시고, 그 고기로 하여금 요나를 삼키게 하셨다. 어쩌면 그가 바다에 던져진 것보다 죽음의 심연으로 더 깊이 빠져든 셈이지만, 죽음의 바다에서 주님은 요나를 구하시려고 커다란 물고기, 곧 생명선을 보내셨다. 바다는 그 자체가 칠흑 같은 죽음의 감옥이다. 거기서 요나는 속절없이 죽었겠지만, 하나님께선 그를 생명선에 옮겨 태우시고 일단 그를 살려내시어 다시 니느웨 복음전파를 위해 보내셨다. 요나가 생명선 안에서 살아났다. 커다란 물고기가 살아있는 자를 몸에 품고 어찌 살 수 있겠는가? 그가 삼킨 자를 토해내야만 자신이 살 수가 있다. 하지만 큰 물고기가 요나를 바다 밖으로 토해냈지만, 그가 그 때 살아난 것이 아니라, 요나가 고기뱃속에서 살아났기에 육지로 토함을 받아 부족한대로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할 수 있었다.
요나의 이야기는 정말 나사로의 경우와도 닮은꼴이다. 주님께서 사랑하신 나사로가 주님의 방문을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죽었다. 그가 죽어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주님이 그의 두 자매가 슬피 울면서 좀 더 일찍 오셨다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거라고 원망도 했지만, 주님께선 그들의 집으로 가시지 않고 바로 나사로 묻힌 동굴 무덤을 찾아가셨다. 그 무덤 앞에서 사람들에게 막아놓은 ‘돌을 옮겨 놓으라.’고 말씀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외치시자,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나왔다. 손발은 천으로 묶여 있었고, 얼굴은 수건으로 싸 매인 채 그 주검이 살아서 나왔다. 무덤을 나와서 산 것이 아니라, 죽은 자가 무덤 속에서 살아서 삐죽삐죽 걸어 나왔다. 나사로의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께 ‘하늘로부터 온 표적을 요구한’ 종교지도자들에게 자신의 부활의 유일한 증거로 요나의 표적을 제시하셨다(마16:1). 진정 죽은 요나가 고기 뱃속에서 살아서 토함을 받았다는 사실과 주님께서 무덤에서 살아나셔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실 거라는 복음의 증거를 요나의 표적과 동일하게 묶어서 자신의 복음을 선언하셨다.
우리는 새해 첫날을 맞으면서 각자가 지금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 자신을 확인하고, 누구라도 오늘 여전히 하나님 안에서 살아있다면, 큰 기쁨이요 축복이다. 하지만 누구라도 아직 생명에 대한 확신이 없다고 의심된다면, 죄인을 살리시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의 복음으로 2019년 새해 아침이 환한 부활의 생명으로 모두가 행복했으면 정말 좋겠다<우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