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 게시판
HOME > 나눔터 > 나눔 게시판
짧은 글(166):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이다!’(2)
하나님께서 소위 시(詩)를 창작하시듯 계속해서 꼼꼼한 수작업으로 글자 하나하나 정성껏 만드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작품(workmanship)(NKJV)이 되게 하셨다는 표현이 너무 신기해서 헬라어 신약성서 에베소서2:10절을 찾아보니 우리말의 ‘작품’이란 말의 원어가 포이에마(poiema), 영어의 시(poem)가 바로 헬라어 Ποιημα(포이에마)에서 온 것임을 알았다. 그렇다. 우리가 바로 하나님께서 손수 깎고 다듬어서 창작하신 한 편의 시(詩)요, 흠잡을 데 없는 걸작으로 탄생했다는 뜻이다. 물론 부끄럽기 한량없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창작인 걸 누가 부정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렇다. 다윗이 왜 그토록 많은 시편을 썼을까? 하나님의 시심(詩心)을 닮았기 때문은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 속엔 시(詩)의 형식을 빌려서 간결하지만 깊이 있게 전해준 하나님의 뜻이 많다. 욥기는 시로 쓴 드라마라 할 수 있고, 잠언도 시 형식으로 창작된 것이고, 전도서, 아가서 그리고 선지자들의 메시지도 많은 부분이 시의 형식을 빌려 쓴 것들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의 함축성과 절제된 모습을 보여주기에 시(詩)가 안성맞춤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먼저 하나님의 손으로 지음 받은 우리가 한 편의 시(詩)라고 생각해 보자. 나를 혹은 너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오직 나와 너를, 마치 시를 짓듯 꼼꼼히 창조하신 하나님밖에는 나와 너를 알 수 있는 다른 존재는 없다. 시는 시인만이 알 수가 있다. 평론가가 아는 것이 아니다. 시문(詩文)에서의 기승전결(起承轉結)은 시인만이 알 수 있다. 시인의 뜻이 거기에 담겨져 있다. 우리 중에 누가 기승전결 어느 부분에 들어갈지는 시인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 ‘너’를 기(起)로 잡아 시작해서 ‘나’로 하여금 ‘너’를 이어가는 승(承)으로, 또 다른 이는 변화를 주는 전(轉)으로, 또 다른 누구를 결론을 맺는 결(結)로 사용해서 한 편의 시를 만들어 하나의 작품을 만드신 분이 창조주 하나님이시란 뜻이다. 나와 너, 또 다른 누구도 하나님의 시문(詩文)에서 떨어져 나오면 실제로 아무 것도 아니다. 너와 나, 혹은 모든 이웃이 모두 적절히 자기 자리에서 자기 맡은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때,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온전한 작품이 된다. 그 작품이 무엇일까? 하나님께서 모두 망가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속량하셔서 만드신 작품이 바로 우리 사람들이요, 그런 사람들로 구성된 생명체가 곧 교회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손으로 직접 만들어진 작품’, 이것이 곧 새로운 생명체인 교회이다.
최초로 하나님의 교회가 창조돼 땅위에 자리 잡은 때는 정확하게 주님께서 부활과 승천으로 이어진 50번 째 날 곧 오순절에 성령의 임재로 예루살렘 교회가 기적적으로 탄생했고, 그 놀라운 장면이 사도행전 2장에 등장한다. 120명이 모인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임한 진리의 영과 생명의 영인 성령으로 하나님의 집이라는 교회가 탄생했다. 교회를 탄생케 한 주체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서, 성령이 시키는 대로 각각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였다(행2:4).’ 성령에 의한 언어의 잔치가 열려 외국어를 배우지 않은 갈릴리 사람들이 그 땅에 온 외국인들이 모두 알아듣는 말로 제자들이 전한 복음을 들어서, 그 말씀의 잔치로 교회가 탄생했다.
바울은 에베소에 보낸 편지에 교회가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만드신 작품이요, 그 작품이 곧 하나님의 교회인 우리 모두인데 누가 감히 하나님의 작품을 망가뜨릴 수 있겠는가?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미리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며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엡2: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