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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187): 하나님과 신비주의(1)
먼저 ‘하나님께선 결코 신비한 분이 아니시다!’란 선언으로 결론을 대신한 후에 하나님과 신비주의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 관해서 짤막하게나마 이야기해 볼까 한다. 물론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표현으로는 하나님을 전지전능부소부재라는 한 마디 어구로 하나님의 속성을 말하고 있기에 기억하기는 아주 쉽고, 어쩌면 그 한 마디를 쉽게 이해할 수 없기에 하나님을 신비한 분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내 생각으로는 하나님은 ‘감히 필설로 설명할 수 없는 분(indescribable)’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훨씬 더 알맞은 표현이 아닐까 혼자서 생각해 보았다.
하나님께로 이래저래 접근하다가 결국 신비주의에 빠진 사람들이 있었다는 건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물론 오늘날에도 우리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에 굳이 역사를 뒤져 그런 사람을 찾아 왈가왈부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한 마디로 단언컨대 하나님을 찾다가 신비주의에 빠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누구라도 처음부터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니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신비스러운 곧 미스테리(mystery)한 분으로 여기고 애당초 하나님의 말씀과 믿음으로 하나님을 알려거나 접근하려고 하지 않았기에 하나님과는 인격적 교제가 어려운 사람들이 자신을 보다 깊숙이 숨겨 자신도 마치 신비한 존재인 것처럼 보이려고 피난처로 택한 것이 신비주의가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 각 가정의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후손들에게나 온 식구들에게 잘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신비스러운 존재가 아닌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는 앞서 이야기한 대로 감히 우리의 ‘필설로 설명할 수 없는 분’이신 건 맞지만, 그의 자녀들에게 결코 알 수 없는 신비스러운 존재가 아니시란 사실을 먼저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을 감추어 신비스러운 존재인 양 처신하신 적이 결코 없으셨기 때문에 누구든 멀리 떨어져 살고 계신 부모님에게 편지를 보내듯, 혹은 전화하듯 그렇게 하나님과 일상으로 만나 교제할 수 있어야 한다. 비록 두껍고 묵직한 하나의 책으로 엮어진 그분의 말씀이지만, 그 책을 읽고 묵상하는 것은 그분과 교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 말씀 속에 이미 하나님의 모든 뜻과 경륜이 언제나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심비 속에 자신을 감추신 것이 없다. 사실 어느 누구에게든 신비함이 느껴진다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진실 여부에 관한 의심이 생겨나면서 인격적 교제가 불가능해진다.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져볼 것도 많은데 오리무중인 신비한 것까지 살펴볼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어느 가정에서 그 집의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마치 베일을 쓰고 신비스러움으로 자신을 감싸고 있다면, 그는 자녀들이나 가족들에게 군림하는 자일 수는 있어도 결코 정상적인 생명관계 속의 아버지나 할아버지일 수는 없다. 하나님께선 어느 누구에게서 할아버지 혹은 그 이상으로 호칭되는 일이 없으시다. 내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다고 해서 내 자녀들이 하나님을 할아버지라 부르지 않고, 우리 손자들도 하나님을 나와 동일하게 아버지라고 부르니 모든 인류가 하나님 아버지의 동일한 자녀임을 천명하신 것을 왜 모르는 척 하는가?
하나님께선 모든 사람들로부터 아버지 이상의 노인으로 호칭되신 적이 없으시다. 한 가정에선 고조부만 되어도 그의 후손들이 알 수 없는 신비한 존재가 돼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오고가는 모든 역사 가운데서 하나님께선 아버지 외에 다른 호칭으로 불리신 적이 없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 한국에선 소위 이단 종파의 우두머리들이 그들을 따르는 무리들에게 신비감을 주려고 알 듯 모르듯 코 묻은 손수건이라도 하나 떨어뜨렸다면, 그것을 손에 넣은 사람은 그런 수건이 바로 만병통치약이 되곤 했었다. 실제로 그런 우상들이 아무 효력을 내지 않아도 무엇에든 신비감을 부여해 그런 것을 소유한 자 역시 신비한 존재인 양 행세하곤 했었다. 참을 모르면 거짓이 곧 신비이다. 진리요, 지식의 총화이신 하나님을 자신도 모르는 신비 속에 묻지 않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