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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243): 회개의 삶, 하나님께로 다가가기
우리 주님의 부활은 아들 그리스도와 아버지 하나님의 기쁨이요, 영광이긴 하지만, 우리가 영원한 생명의 주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원히 살아가려면 땅위에 살고 있는 동안은 계속해서 회개의 삶이 지속적이어야 한다. 바울의 말처럼 날마다 죽어야 날마다 산다는 것은 날마다 순간마다 회개하는 삶으로 하나님께 돌아가겠다는 다짐의 뜻으로 받아들이면 좋겠다. 우리 각자의 회개가 없다면 각자의 죽는 삶이 불가능하고, 죽지 않으면 다시 살 수가 없다. 회개는 단순히 입의 말로 하늘을 향해서 ‘잘못했습니다!’만 되풀이하고,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자신의 힘으로 살겠다는 태도는 회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힘으로 날마다 새 삶을 살아가는 영적 방향을 고쳐세우는 일이 곧 회개이다. 주님의 죽으심은 인간 모두의 잘못 때문이라는 걸 마음을 다해 고백하는 믿음, 곧 그분의 죽으심이 우리 각자의 죄 때문이란 사실을 믿어 회개가 일상의 새로운 삶이어야 하고, 진정 우리의 회개의 삶이 하나님의 마음에 닿아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다면 참 좋겠다.
‘예수는 우리의 범죄 때문에 죽임을 당하셨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살아나셨습니다(롬4:25).’ 날마다 의로운 삶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마음이 곧 하나님께 다가가는 회개의 삶의 여정이다. 회개가 곧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삶의 기쁨이어야 하는 건 이 때문이다. 우리가 회개하면 천국에 가게 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면 천국이 우리에게로 다가와 우리의 것이 될 수가 있다(마3:2). 회개가 곧 하나님을 찾아가는 바로 그 길이며, 또한 진리와 생명을 찾아가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멀리서서 ‘하나님 아버지 잘못했습니다,’라고 입으로 조아리다 끝내는 것이 아니라, 느리고 힘들더라도 하나님을 향해 날마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는 발걸음이 회개의 삶이다. 그런 마음을 가지려면 영적 배고픔으로 심령이 정말 가난한 안타까운 자가 되어야 한다. 돼지 먹이인 쥐엄 열매라도 먹어 굶주린 배를 채우고 싶어 할 만큼의 영적 배고픔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영적 배고픔이 우리 각자의 발걸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만든다. 내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나를 받아주실까, 이런 염려는 하나님께로 향하는 우리의 발걸음만을 더더욱 늦추게 만들 뿐이다.
우리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당하신 배고픔과 가난, 종교지도자들의 비난과 살해 위협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하나님께서 자신을 땅에 보내신 그 뜻에 순종하여 최후의 고통의 십자가를 지실 수가 있었다. 사탄은 돌을 가지고 빵을 만들어 먹으라고 유혹했지만, 육신의 배고픔을 영적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넉넉히 이기신 것을 보더라도, 우리의 영적인 삶의 원동력은 곧 영적 배고픔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영적 배고픔을 느끼지 못하면 하나님께로 발걸음을 옮겨 놓을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날마다 혹은 순간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을 기다리시며 또 돌아오는 자를 보시면 쌍수로 환영하며 기뻐하시는 것은 돌아오는 자들이 먼저 피 흘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또 그분의 부활을 믿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합니다.’라고 기뻐하고 돌아온다는 것을 아시기에 하나님께선 그 믿음을 기뻐하신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세리들과 죄인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보고, ‘이 사람이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구나.’라고 투덜거렸다(눅15:2). 주님께서 죄인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음식을 함께 잡수시는 모습이 바로 자신의 죽음으로 거둬들일 사람들과의 사전 교제였다.
양 백 마리를 가진 주인이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찾아다니지 않겠느냐?’고 물으신 비유에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이고, 길을 잃어버린 사람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잊지 않아야만 자신을 찾으시는 주님을 길거리 어디에서든, 더더욱 험한 곳, 어디에서든 찾아오신 주님을 만날 수가 있다. 자신이 서있던, 혹은 현재 서있는 자리가 어디이든 회개의 결과는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성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