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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246): 빠르고 느린 시간의 차이
세상의 발전한 모습을 말하라면, 아마도 속도가 빨라진 것을 꼽을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더구나 어려움을 당한 경우라면 누구라도 좀 더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바라지만, 기쁘고 행복한 시간을 누리고 있다면, 흘러가는 시간이 낭비인 것 같아서 그 시간을 꼭 잡아 두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고로 시간의 속도는 특히 사람들이 맞이하는 상황에 따라서 달라지고 그 가치 부여에 따라 느리게 혹은 빠르게 달라지는 것이 정상이다.
요즈음은 특히 코로나바이러스의 창궐로 전 세계가 그 바이러스의 창궐의 속도가 늦춰지거나 혹은 속히 사라지기를 바라지만(속도의 느림과 빠름이 공존한다). 아무래도 그 바이러스의 침입으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은 회복의 속도가 더더욱 빨라지기를 바라는 게 인지상정이다. 개인은 물론이지만, 가족들도 나라들도 모두가 코로나가 속히 사라지기를 학수고대한다. 모두 빠른 속도를 기대한다. 이것을 속도의 아이러니라고 부르면 어떨까 싶다.
요즈음처럼 집에 갇혀 있어 활동이 정지된 상황 속에선 정말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 같은 80을 넘은 노인이라면 이렇게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고 생각될 땐 마치 늙어가는 속도도 느리게 가는 것 같아 더 좋게 보일 수도 있지만, 느리게 가는 것처럼 보이든, 빨리 흐르는 것처럼 보이든, 속도가 우리의 생각과 느낌에 좌우지 되지 않으니 빠른 속도면 빠른 속도로 보아야 하고, 느린 속도면 느린 속도로 정직하게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아무튼 나이와 관련된 속도 이야길 여러 번 들은 적이 있다. 나이만큼 속도가 빨라진다고 말이다. 사실 고속도로에 올라타면, 지역마다 속도 표시가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아무리 빨리 달리라는 속도 표시가 돼 있어도, 그것보다 더 느리게 운전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속도위반은 저절로 나와는 멀어진 것 같지만, 25마일 지점에서 26마일나 30마일이나 속도위반은 매 한 가지이니 그저 조심해서 운전하며 다니는 게 상책이다.
여기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특히 세상의 빠른 속도에 함몰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속도는 서로의 경쟁의식에서 나온다. 1970년 초에 겪은 이야기이지만, 어떤 아는 분의 자가용을 타 본적이 있는데, 버스나 기차를 타고 살던 시절에 자가용을 처음 타본 것인데, 운전 속도가 얼마인지도 모르지만, 우선 그는 자기 앞에 다른 차가 가는 것을 못 참고, 앞에 가는 차를 기어코 추월해야만 여유를 찾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앞에 다른 차가 없으면 평안하게 속도를 늦추거나 줄이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속도위반을 자신만의 특기인 양 속도를 즐기던 사람이었다.
빠른 속도 속에서 느리게 살면 모두 뒤처지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아무리 느리게 살아도 살아갈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선 ‘나무느림보(sloth)'라는 동물을 지으셨는지 모른다. 아마도 우리가 ’느림의 미학‘을 배우고 싶다면, ’나무느림보‘에게서 찾았으면 좋겠다 싶다. 그는 1분에 6.5피트 움직이는 그 이름에 걸맞은 ’느림보‘인데, 그는 배가 작아서 나무 잔가지, 혹은 열매나 잎이나, 벌레나 작은 도마뱀 혹은 작은 새도 먹긴 하지만, 한 번 먹으면 그것들을 소화시키는데 16일이 걸린단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나무에 거꾸로 매달려 살아가는데 변을 보기위해서 1주일에 한 번 나무에서 내려온다. 그의 생존방식은 결국 빠른 속도가 아니라, 배의 작음이요, 느림이다.
어차피 우리 인생은 우리가 만든 속도로 살아갈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께선 창조이후 오늘까지 한 번도 속도를 내보신 적이 없으시다. 모든 피조물들은 시간에 붙잡혀 속도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살아가지만, 하나님께서 영원한 분이기에 속도에 영향을 받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아무리 빠른 속도로 하나님의 곁을 떠나더라도 하나님께선 언제나 거기 계시고, 아무리 느리게 느림보처럼 살아도 하나님께선 언제나 거기 계신다. 영원하신 하나님과 그분의 영원을 산다면 땅위에서의 시간에 좌우지되지 않아야 한다는 진리를 ‘나무느림보’의 삶에서도 배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