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 게시판
HOME > 나눔터 > 나눔 게시판
짧은 글(254): 명사수(名射手)가 아니면 죄인인가?
죄인과 명사수,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인데, 과연 무슨 뜻일지 궁금해 할 사람들도 있을 법하다. 명사수는 전장에 나가는 군인들 사이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어떤 면에선 사수(射手)인 것이 분명하다. 누구든 어떤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항해 쏜살같이 달리는 삶을 살아간다면, 목표를 맞추는 정확한 활쏘기나 혹은 총 쏘기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연습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누구도 무시할 수 없다. 삶의 목표가 애당초 없다면, 활쏘기나 총 쏘기 연습이 전혀 필요치 않겠지만 말이다. 우리의 일상을 활쏘기나 총 쏘기라고 말한 것은 어떤 과녁이나 목표물에서 빗나간 것은 성서에서 죄라고 정의하고 있기 때문에 누구든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을지라도 궁수이거나 사수일 수가 있다는 말이다.
우리 인간의 일상은 활을 둘러매고 다니는 사냥꾼의 삶일 수가 있고, 전쟁에 나가서 적의 목을 꿰뚫어야 하는 특등사수의 삶일 수도 있지만, 우리의 일상의 경험으로는 목표에서 빗나가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래서 특등 사수도 아니고, 혹은 사냥을 나갔다가 아무런 소득 없이 빈손으로 귀가한 허탈한 사냥꾼일 수도 있다. 마치 야곱처럼 어머니 치마 자락 붙들고 어리광을 부리며 살던 그가 형 에서는 사냥으로 짐승을 잡아 왔지만, 그 동안 야곱은 어머니의 삐뚤어진 사랑 때문이었다고 핑계할는지 몰라도, 집안의 가축을 잡아서 아버지를 속여서라도 자신이 바라는 목표를 이루려 했다. 하지만 그는 화살조차 당겨보지 못한 체 소득을 챙기려 했던 야곱의 거짓된 삶, 이것이 죄요, 죄인의 삶이다. 목표를 잘못 세운 것도, 목표에서 빗나간 삶도 모두 죄이다.
어쩌면 모든 사람이 모두 어떤 목표를 가졌고, 그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삶을 활쏘기나 총 쏘기라고 가정한다면, 사람마다 겨누는 목표가 다를 수가 있으니 목표를 바로 잡아 세우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도 알 것이다.
한 가지 예를 든다면, 베드로가 전문 고기잡이 어부였지만, 밤새도록 헛수고만 하고 아침을 맞았을 때, 주님께서 그에게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고 지적하셨고, 그는 거기서 많은 고기를 잡을 수가 있었다. 고기를 잡기 위해서 출항하는 모든 배들에게 목적지가 있는 것처럼 평범한 우리의 일상에도 크건 작건 목표지점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런저런 목표를 많이 둔 사람이라면, ‘주님은 나의 능력, 나의 노래’라는 시118편14절의 말씀을 묵상할 필요가 있다. 나의 노래가 지향하는 목표는 오직 하나님 한 분이란 뜻이다. ‘하나님이 나의 노래’라면, 하나님 외에 다른 모든 것들을 내 노래에서 제외시켜야만 한 분 하나님만이 ‘나의 노래’가 될 수 있다. 시편 기자처럼 ‘하나님이 나의 노래’라면, 하나님만을 드러내는 것이 자신의 노래여야 한다. 하나님과 관계없는 외적인 것들을 모두 제거해버려야만, ‘하나님만이 나의 노래’로 빛을 발한다. 다른 것 다 제쳐두고 오로지 자신의 이익에 목표를 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크리스천들처럼 하나님 아버지만이 자신의 삶의 목표인 경우도 있다. 전자의 겨우는 목표가 다양하지만, 후자인 크리스천의 목표는 오직 한 분 하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 한 분이시다.
어쩌면 모든 삶의 목표가 오로지 하나 뿐이라면, 진정 크리스천의 일상의 유일한 목표는 구체적으로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이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시22:3).’ 풀어서 말하면, ‘주님은 거룩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찬송 가운데 좌정해 계십니다.’이다. 찬양을 받으실 오직 거룩하신 한 분 하나님, 이렇게 한 분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이 하나님 찬양이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들을 찬양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찬양 속에 좌정하실 수가 없다.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자.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빌1:21).’ 바울은 오직 그리스도 한 분에게만 목표를 맞추고 살았다. 오직 그리스도 한 분을 살 때만이 죽는 것도 유익이 된다고 말한 것. 그는 철저히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에 맞추어 살았던 명사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