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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255): 예수의 붉은 육성, 그 피의 언어를 묵상하며(1)
일상의 평범한 삶을 살든, 물건을 사고파는 장사를 하든, 누구와 어떤 거래로 살아가든 수지타산을 맞춰보다가 손해났다는 사실을 알면 붉을 색깔로 (적자(赤字)임을 표시해 두는 것이 가계부나 혹은 비즈니스 장부가 아닌가 싶다. NIV 성서를 보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부분만 특별히 붉을 글씨로 인쇄된 것을 볼 수 있는데, 혹시 그분의 피 묻은 말씀에 초점을 맞춰 그 말씀의 뜻을 중시한 때문이 아닐까 싶다. 곧 우리 주님께서 직접 목소리를 발해서 남기신 그 말씀을 직접 경청하는 자세로 묵상하려고 한다.
마태복음에 맨 처음 등장하는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은 세례자 요한과의 대화인데 요한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이 아래의 짤막한 구절이다.
“지금은 그렇게 하도록 하십시오. 이렇게 하여, 우리가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옳습니다(마3:15).”
주님께서 요단강에서 찾아온 백성들에게 세례 베풀고 있는 요한을 찾아가셔서 그에게서 세례를 받고자 하셨을 때, 요한은 ‘선생님께 제가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라고 말하며 세례 베풀기를 만류하며 머뭇거렸다. 그 때 주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이다. 지금 요한이 세례를 베풀고, 주님께선 그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것, 이처럼 두 분의 행위를 가리켜서 ‘우리가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라고 밝히셨다. 그 뜻이 과연 무엇일까?
여기서 두 분이 세례를 주고받는 절차를 통해서 ‘의를 이룬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는데, 과연 그 의가 무엇인가? 누구의 의를 이룬다는 것이었을까? 그렇다. 먼저 우리에게 익숙한 물세례의 의미를 살펴보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싶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의를 이루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일까? 물세례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생명의 본질적인 모형이다. 주님께서 받으신 물세례는 단순히 의례의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땅위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그분의 아들이라는 선언과 더불어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너희의 죗값을 치르기 위해 내가 죽으러 왔노라.’는 확실한 선언이기에 그리스도의 죽음과 삶을 한 폭의 그림처럼 보여준 물세례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여기서 말하는 의(義)란 우리들의 어떤 도덕적 행위로 이루는 행동의 의가 아니라, 의의 본체이신 하나님의 그 의가 인간의 범죄로 상처를 입으셨기에 하나님의 그 의가 회복되어야만 죄인도 의롭다 함을 옷 입고, 그 칭의(稱義)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을 사전에 보여주신 그림이 곧 요한에게서 받으신 물세례이다.
인간의 죗값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의로우신 주님의 죽으심으로 치러져야만 우리가 하나님의 의(義) 앞에 설 수 있도록 칭의로 자격이 부여된다. 하나님의 상처 입은 의가 우리 죄인들의 죽음으로는 회복될 수 없기에 의로우신 주님께서 대신 속죄의 죽음으로 먼저 우리의 죗값을 치르셔야 했다. 주님께선 미리 보여주신 물세례의 표징대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그러나 우리는 물세례를 통해서 주님의 죽음에 동참하는 의식에 참여한 것이다. 우리가 실질적인 죽음을 죽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바울의 고백처럼 날마다 죄에 대해서 죽어야 한다. 우리 각자가 자신의 힘으로 죄를 이길 수 없지만, 죄에 대해서 죽어야만 죄가 내게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다. 이것이 날마다 죄를 이기는 실질적인 죽음이다. 세상에 과연 누가 ‘나는 이 땅에 죽으러 왔다.’고 먼저 선언하고,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옳다.’고 밝히고 그 죽음의 때에 맞춰 복음의 일상을 살고, 하나님의 뜻인 자신의 죽음의 때가 다가오자, 그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 죄인들을 위해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놓을 자가 우리 주님 외에 과연 누가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