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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273): 잔디는 잔디여야 산다!(1)
잔디 깎는 기계의 굉음이 이른 아침의 고요를 힘차게 깨뜨린다. 잔디 깎는 기계는 자신의 목소리인 큰 굉음이 바로 그가 살아있다는 힘찬 목소리인 양 힘깟 뿜어낸다. 만약 그 기계가 굉음을 내지 않으면 제 수명이 끝난 것일 수도 있을 터. 도끼가 도벌군의 손에 잡히면 싱싱하게 살아 있는 나무를 마구 찍어버릴 수도 있지만, 잔디기계는 잔디를 잔디 되게 살리려는데 사용되기에 굉음이 곧 잔디를 살리는 고마운 노랫소리인 셈이다.
그 기계가 깎아내는 잔디는 자라기를 그치는 추운 날씨가 다가올 때까지 잔디의 윗 몸통을 사정없이 잘라주어야만 잔디가 그냥 풀이 아니라, 잔디라는 이름을 자랑스럽게 유지하며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존재가 된다. 잔디는 크게 자라면 자랄수록, 자기 몸통의 윗부분을 날려 보내주는 잔디 깎는 일꾼에게 고마운 마음으로 다소곳이 협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잔디의 수명은 단명에 그치고 만다. 만약 잔디가 오기를 부리며 자기 윗 몸통을 내놓지 않고, 쑥쑥 자라기만을 고집한다면, 그것이 잔디로선 곧바로 수명이 끝난 황폐, 그 자체이다. 자연은 돌보지 않고 그대로 놔두는 것이 황폐이다. 에덴을 지으시고, 아담을 그 땅에 살게 하시면서 자연을 돌보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셨다. 혹시 아담은 잔디 깎는 사람으로 임명받은 셈이다. 잔디는 진짜 깎아주지 않으면 곧바로 잔디의 수명을 잃는다. 잔디는 자신의 몸의 일부를 기꺼이 내어놓아야만 자신의 생명을 유지한다.
우리가 어느 동네를 걸으면서 어느 집 앞이나 어느 집의 정원이 잔디가 아니라, 긴 풀들이나 노란색의 민들레로 뒤덮고 있다면, 가장 먼저 어떤 생각이 드는가? 일단 그것은 잔디의 죽음이고, 그 집 정원의 죽음이고, 어쩌면 그 집 주인의 죽음의 증표일 수도 있다. 설령 주인이 죽지 않았다고 해도 주인이 아파서 잔디를 깎을 수 없다거나 돈이 없어서 잔디를 손질할 사람에게 맡기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한 집안의 잔디의 죽음이 여러 가지 불길한 징조일 수 있고, 또 잔디밭에서 골프로 치는 사람들에게도 좋은 현상일 수는 없지만, 사람들에게도 잘라내야 할 부분을 과감히 잘라내야만 제대로 사람 노릇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떠오르기도 한다.
이스라엘백성들이 40년간의 광야생활을 끝내고 사해와 연결된 사해 맨 위쪽 요단강을 건넌 후에 길갈에 진을 치고 가나안 땅의 관문인 여리고성을 무너뜨려야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여리고성이 무너진 장면은 어쩌면 가나안 땅의 잔디를 처음으로 깎기 시작한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건 가나안 땅이 그 동안 손질하지 않은 채 제멋대로 망가진 잔디를 다소곳이 깎아서 가나안 땅 전체를 아름답게 꾸미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중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하나님께서 단지 이스라엘만을 사랑하셔서 이방인들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것이 아니다. 아마도 그 증표로 그 땅에서 라합과 그의 온 가족을 살려두셔서 라합은 그리스도의 족보에 등재케 하신 것이 아닌가? 여리고 성의 정복을 내가 잔디 깎기라고 말한 것은 그 땅의 첫 관문인 여리고 뿐만 아니라, 온 가나안 땅도, 그 땅에서 살아가게 될 이스라엘도 잔디를 깎듯 철저히 깎아서 잔디가 잔디답도록 만들어주셔야 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걸 보여주신 것이다.
어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편애하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여리고 성 정복에 앞서 여호수아가 여리고 가까이 갔을 때, ‘어떤 사람이 손에 칼을 빼들고 자기 앞에 서 있는’ 걸 보고서(수5:13), 여호수아가 그에게 다가가서 ‘너는 우리 편이냐? 우리 원수 편이냐?’고 물었다.
그는 어느 편도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가 어느 편도 편애하지 않으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을 여호수아에게 전한 것이다. 일단 누구든 편애하면, 그와 다른 편에 대해선 아예 관심을 끊게 된다. 그런데 그 손에 칼을 든 장수가 자신은 어느 편도 아니라고 부정한 것이다. 그의 부정의 말의 참 뜻이 무엇일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참뜻일진대 뒤에 이어서 더 생각해 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