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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280): 믿음과 개인의 충성맹세
어느 개인의 충성맹세가 하나님께서 선물하신 개개인의 믿음의 도를 뛰어넘는 경우가 언제 어디서든 일어나고 그것이 약점으로 드러난다. 충성맹세가 과장이든 과소든 진실을 벗어난 거짓이라는 걸 잊기 쉽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과장이나 과소나 자신을 속이고, 상대를 속이는 것이라는 걸 깨닫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사실 어느 조직이든, 혹은 정상을 벗어난 행동으로 살아가는 자가 조직 안에 있게 마련이고, 그것은 충성맹세 강조로 이어지는 건 조폭 스토리를 다룬 여러 드라마나 영화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 충성맹세는 진실이 아니고, 관계가 비정상인 경우에 생겨난다.
먼저 개개인의 충성맹세를 살펴보아야 한다. 충성맹세는 이성과 감정을 초월하는 경우가 나타나게 마련인데. 충성맹세를 받는 주체의 입장에선 보다 확실한 맹세가 중요하다 생각하기 때문에 개개인의 충성맹세 자체가 과장된 거짓으로 나타나기 십상이다. 무엇이든 과하면 안 하는 것만 못하고, 부족한 것만 못하다.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요구하시는 건 충성맹세가 아니라, 단지 말없이 따르는 오직 한 가지 순종이다. 오직 한 가지 부정명령에 대한 순종이다.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지 말라. 이것을 먹는 날에는 죽는다.’ 한 가지 부정명령을 지키지 못하면 죽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충성맹세로 회복될 수가 없다. 충성맹세란 무언가 행동에 초점을 둔 것이다. 하나님의 유일한 명령은 ‘따 먹지 말라.’는 한 가지였다. 그저 따 먹지 않으면 되는 것, 여기에 충성맹세는 필요치 않다. 충성맹세는 자신의 과장된 행동에 초점을 둔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은 무엇을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이 아니라, 오직 한 가지 ‘하지 말라.’는 부정명령에 순종치 않았다. ‘하지 말라.’는 부정명령에 불순종한 것은 선악의 지식을 알아서 자신이 무언가를 하겠다는 탐욕적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하나님께서 무언가를 ‘하라.’고 명령하셨다면, 혹시 마음을 다짐하는 충성맹세가 필요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단지 한 가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지 말라!’였으니 따 먹지 않으면 될 일이었을 뿐, 거기에 더하고 덜 할 그 어떤 행동이 필요치 않았다.
사람의 충성맹세는 야고보가 강조한 두 마음을 품은 자의 소행일 수가 있다. ‘그는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이요, 그의 모든 행위에는 안정이 없습니다(약1:8).’ ‘하지 말라.’는 명령엔 하지 않으면 되지만, ‘하라!’는 명령엔 언제나 두세 가지의 마음이 동반되기 마련이다.
사사시대에 사사 한 사람의 충성맹세가 어떤 비극을 낳게 되었는지를 살펴보자. 사사 입다가 등장한 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주님께서 보시는 앞에서 악을 저질렀다.’는 바로 그 때였다. 이스라엘의 악이란 ‘바알과 아스다롯과 시리아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사람의 신들과 블레셋 사람의 신들을 섬기고, 주님을 버리고 더 이상 주님을 섬기지 않았다(삿10:6).’는 지적이 곧 그 백성의 죄악의 알파와 오메가였다.
이스라엘백성들도 무엇으로 어떤 행동이 필요할지 충성맹세가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단순히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을 섬기지 않으면, 곧 각자가 주인 행세를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순조롭게 정상적으로 돌아갈 일이었다. 하나님 한 분께만 초점을 맞추고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하면 될 일을 자신의 행동을 돋보이게 하려고 충성맹세를 하는 건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과장이었다. 그런데 사사 입다는 엉뚱하게 충성맹세를 하고, 자신의 맹세를 스스로 시행해서 그 결과는 자기 딸을 번제로 죽게 했던 것이다. 사람을 번제로 바치는 행위는 거짓 신들을 섬기던 이방인들의 가증한 행위였다.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입다가 충성맹세를 행동으로 옮긴 것은 결국 하나님을 향한 반역이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