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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319): 우리의 삶의 시제(時制)
우리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존재와 삶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이런저런 언행의 때를 나누어서 살아간다. 그래서 시간 속에서 삶의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 물론 영어시제엔 과거의 행동이 현재와 연결된 현재완료형도 있고, 먼 과거와 가까운 과거가 연결된 과거완료형도 있다. 아무튼 시간을 말했거나 행동한 때를 따라 나누는 것을 문법적으로 시제라고 말한다. 과거는 누구에게든 자랑거리가 될 수도 있고, 숨기고 싶은 후회거리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미래에 희망을 두고 또 다른 삶을 살아보려고 힘쓰고 애쓰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의 삶이 여의치 않을 땐 과거에서 좋았던 때를 되살려 마음의 위로로 살아가기도 한다.
우리가 시제 속에 묶여서 혹은 갇혀서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가 결코 특별한 존재나 유일한 존재가 아니라, 어제와 다른 존재, 혹은 더더욱 변해서 내일엔 오늘의 나와는 전혀 다른 존재로 변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서로의 대화에서 ‘너 참 많이 변했구나.’라고 말하거나 들을 수도 있고, ‘어, 너 하나도 변하지 않았네.’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다. 어쩌면 시제 속에서 종잡을 수 없는 자로 변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다.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와도 다르고, 내일의 나와도 다를 수가 있다. 어찌 보면 나는 종잡을 수 없는 자로 살아가고 있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때문에 내가 시간 속에 붙잡혀 살아가는 한 ‘나’는 항상 동일한 ‘나’가 될 수 없다.‘ 변치 않는 존재로 자리 잡을 수가 없다. 더구나 우리가 시제 속에 살 때엔 뭐 하나 확실하게 내세울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현재나 과거나 미래로 이리저리 도망 다니면서 살아가야 하는 시간에 붙잡힌 존재인지 모른다.
시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성육신으로 사람의 옷을 입고, 성탄절에 시간 속에 오신 사실을 먼저 알고 그분 앞에서 각자가 ‘나’를 내세울 수 있는지를 깊이 묵상해야 한다. 하나님께선 언제나 변함없는, 아니 영원히 변함없는 'I AM'이시다. 영원한 현재이신 하나님께서 시간 속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을 변함없이 언제나 만나실 수 있는 것은 시간은 영원을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가 아닐 수 있다. 내일의 ‘나’가 어찌 될지 누구도 짐작할 수도 장담할 수도 없다. 시간의 제한을 받고 살아가는 우리 인간의 현실을 누구도 자신의 뜻대로 만들 수도 보장할 수도 없다. 여기서 하나님의 이름인 'I AM'을 어떻게 받아들일 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선 언제나 ‘I was’라는 과거로 말씀하신 적이 없으시다. 영원은 영원히 현재일 뿐, 과거가 있을 수 없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셨다면, ‘나는 길이었다, 진리였다, 혹은 생명이었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으시다는 뜻이다.
영원히 현재이신 하나님께는 현재나 과거나 미래로 나누어서 살아가는 나의 시제로는 다가갈 수 없는 분이시다. 누구든 하나님을 만나려면 항상 오늘 현재로 만나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도 오늘 현재로 ‘사랑합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나는 어제 하나님을 사랑했다는 과거형으로는 지금도 여전히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지는 스스로 보장할 수 없다. 나는 과거에 잘 믿었다는 말도 구원의 보장이 될 수 없다.
만약 주님께서 ‘나는 길이었고, 진리였고, 생명이었다.’ 이렇게 과거형으로 말씀하셨다면, 주님께선 과거 어느 누구에게 길이었고, 진리였고, 생명이었는지는 몰라도 오늘의 우리에게는 상관없는 분일 수 있고, 지금은 우리가 전혀 몰라도 상관없는 분일 수가 있다. 지음 받은 인간은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로 지음 받았지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부여받았기에 시간 속에서도 영원을 바라고 영생을 누리고 살 수 있는 존재라는 자기 정체성을 현재로 다잡고 살아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시간이 흘러간다고 아쉬워 할 필요가 없다. 너무나도 분명한 하나님의 영원을 붙들고 힘써 살아간다면, 시간은 극복되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