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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323):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벌써 어제는 새해 첫 날이었고, 오늘은 둘째 날 1월 2일이고, 내일은 동일하게 어느 기계의 톱니바퀴처럼 자동적으로 돌아 3일이 될 것이다. 너무나 쉽고 친근하게 느껴지는 시간의 조합, 단순히 우리 일상의 나열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시간 개념은 그렇게 간단치가 않다. 물론 하나님을 배제시키면 하루하루가 아주 작은 점에 불과한, 더더욱 작은 점의 나열로 시간과 시간 사이의 간격에 그치고 만다. 그러나 시간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시간에 개입하시는 것이라면,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그렇게 간단히 이해하고 지나갈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위의 글 제목에서 언급한 시간의 조합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이 구원을 받을 만한 때는 언제일지를 묻는다면, 그 대답은 단순히 시간의 조합도 아니고, 그 사실을 설명하는 것조차 그리 쉽지가 않다는 걸 알 것이다. 지금은 그런 질문들이 사라진 것처럼 조용하긴 하지만, 한 때 소위 구원파라 일컫는 사람들이 특히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만나면, ‘언제 구원 받았느냐?’고 묻는 것이 그들이 전도의 대상으로 삼을 때 사용하는 동일한 방식의 첫 마디였다.
나는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생일 없는 소년으로 살아온 세월이 긴지라, 내 생일조자 기억이 희미한데 영원한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날을 어찌 기억할 수 있겠는가, 라고 말할 수도 있고, 내 생일을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낳은 어머니나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을 뿐, 어머니가 말씀하신대로 다른 식구들도 기억하고 있을 뿐, 정작 모태에서 태어난 나는 그 날을 알 수가 없지만, 어머니나 다른 식구들의 기억을 듣고 알아서 믿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서 그 백성의 구원의 날을 말씀하셨지만, 정확하게 날짜를 못 박으신 것이 아니라서, 마치 ‘서울 가신 아빠, 혹은 오빠’를 기다리는 어린 딸, 혹은 어린 동생의 날짜 계산과는 차원이 전혀 다르다는 걸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선 언제나 먼저 약속하시고, 그의 백성들이 그분이 날짜를 명시하지 않으신 채 그 약속을 기다리기를 바라신다. 마치 날짜를 명시해 주실 수 없으신 분이라는 걸 설명해주시듯,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고 하나님의 시간 개념을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어투로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에겐 하나님의 약속이 더디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자신의 어느 순간에도 하나님의 약속이 이뤄질 수 있으니 만반의 준비를 갖춰가며 기다릴 수도 있다.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말씀의 표현을 나는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께서 한 편 강도가 주님을 향해 ’예수님, 주님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눅23:41).‘라고 부탁을 드렸을 때, 주님께선 그를 향해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42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여기서 주님께서 한 강도를 구원으로 초청하신 ‘오늘’은 우리들의 일상과는 전혀 다른 24시간의 하루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내가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이라는 글 제목에서 말한 ‘오늘’은 ‘어제’와 ‘내일’과는 전혀 다른 시간 개념이기에 한 강도가 ‘오늘’ 구원 받은 사실이 육신의 죽음너머, 영원히 구원을 받은 걸 알 수 있다. 그는 사형수로 죽음 직전에 영원한 영적 구원을 받았다. 그가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오늘’ 구원 받았다는 것은 그의 ‘어제’는 물론 ‘내일’도 구원 받았다는 보장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오늘’은 어제와 내일을 영원한 현재로 만드셨다는 걸 알 수 있다. 누가 ‘나는 오래 전에 구원 받았어’라고 말할 적에 오래 전의 과거가 ‘오늘’의 구원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과거에 받은 구원은 오늘 보장되지 않는다. 구원은 영원한 ‘오늘’이어야 하고, 영원히 현재여야 한다. 영원한 현재와 관련이 있어야 하나님의 구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