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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349):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교제하며 산다는 것
여러 가지 방법으로 습득한 지식일지라도 나 혼자만의 것이라면 누구에게 들어서든, 책을 통해 취득한 다양한 지식을 어느 정도는 가지고 있겠지만, 그러한 지식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취득할 수가 없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곧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누구든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가 없다면, 하나님을 안다, 혹은 만났다고 말할 수 없다. 사탄조차도 하나님을 알지만, 하나님과의 교제는 불가능한 존재이다. 미국에 살고 있다거나 혹은 요즘처럼 백악관이 코로나 태스크포스로 전면에 자주 나오기 때문에 거기에 등장한 대통령이나 부통령이나 여러 의료전문가들의 얼굴을 보거나 그들의 말을 들어서 어떤 사람인지 어떤 직책을 가진 사람인지 어느 정도 알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누가 그와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들이 TV에 얼마동안 등장했다가 귀를 기우리던 청중들이 알든 모르든 상관없이 각자 자신들로 돌아가면 화면에서 사라짐과 동시에 서로간의 교제 아닌 얼굴교제마저 사라져버리니 그들을 안다거나 교제했다고 말할 수가 없게 된다.
하나님의 얼굴이란 뜻으로 ‘브니엘’이란 장소의 이름이 있지만(창32:24-32), 하나님의 얼굴을 본다고 해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일 수는 없다. 오히려 야곱, 곧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얼굴을 육안으로 보고서도 살아남았다면 그것은 기적과 같은 특별한 은혜였다고 말할 수는 있다.
아무튼 누구든 이러쿵저러쿵 하나님을 말하기 전에 피조물인 우리 각자의 실상을 먼저 돌아보는 일이 급선무가 아닐까 싶다. 우리가 창조주의 지음 받은 존재이면서 뒤늦게 그분을 알고 교제의 필요성을 말하게 된 이유부터 점검하는 것이 바른 순서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배반하고, 각자의 주인 행세가 바로 하나님과는 단절된 각자의 비극적 현실임을 깨닫지 못한 채 오히려 자신의 신분과 가진 것, 혹은 배운 것이 자신을 높이는 힘의 원천이요, 밑받침인 양 그런 것들을 자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 모두의 현주소이다.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다고 고백하지만, 하나님을 떠나 세상에서 자신의 삶의 터전을 찾았다고 생각되면, 자신이 피조물이란 사실을 너무 쉽게 접고 피조물의 유일한 터전인 창조주를 외면한다. 우리의 터전인 창조주께로 향하는 유일한 방법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붙들고 그분의 길을 걷는 것만이 창조주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살아가는 유일한 정도(正道)임을 잊지 말자.
물론 우리 각자의 영적 현주소가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소로서 적합한지의 여부를 항상 점검하는 일이 중요하다. 이스라엘 백성을 만드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선 먼저 아브람을 바빌로니아 우르에서 불러내셨고, 다시 그의 후손들을 이집트 땅에서 불러내 고난과 역경 가운데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셨다.
가나안은 그리스도가 오실 땅으로 약속되었기에 진정 젖과 꿀이 흐르는 하나님의 말씀의 땅이었다. 그 말씀 위에 터를 잡고 살 때, 창조주를 인격적으로 알고 그분과 교제하며 살아가게 되고, 각자의 삶의 터전을 벗어나지 않고, 젖과 꿀을 먹으며 살아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