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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352): 단상으로 엮어 본 조각글 모음<3>
1. 창조주의 쉼
온 우주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의 일곱째 날의 쉼의 진정한 뜻을 모르면 피조물이 자기 신분조차 모르게 된다. 창조주의 일곱 째 날의 쉼은 하나님의 피곤 때문이 아니라, 피조물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더불어 쉼을 갖고 난 후에 하나님께서 주신 임무를 따라 순종하도록 하신 배려로 받아들여야 한다. 어쩌면 그 날의 첫 쉼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 수 있도록 주신 기회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하루하루 창조를 마치신 후에 ‘좋다’, 곧 선하다고 외치셨고, 마지막 순간엔 ‘심히 좋다.’라고 표현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쉼의 하루 전 곧 창조의 엿샛날 마지막에 지음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란 신분을 알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해 마련하신 에덴의 낙원조차 공터로 비어있게 된다. 사람이 낙원에서 창조주의 뜻을 모르고 펼치지 않거나, 오히려 그 곳이 자신의 뜻을 펼치는 곳이 된다면, 그 낙원은 곧바로 망가져버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모든 피조물의 주인 되신 창조주 하나님. 주인이 쉬지 않으면, 종은 쉴 수 없기에 주인 되신 주님께서 먼저 쉬시면서 사람도 더불어 쉬도록 하신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쉬는 쉼이 곧 모든 피조물이 기쁘게 누릴 자유 중의 자유이다. 지음 받은 자의 자유는 창조주와 함께 누릴 수 있을 뿐이다. 창조주를 떠나면 그 어디에도 자유는 없다. 어느 피조물이든 창조주와 더불어 자유를 누리지 못하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볼 수도, 누릴 수가 없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지 못하는 것이 모든 피조물들의 피곤과 곤고함이다.
2. 주님의 행동의 요구와 우리 반응의 오류
주님의 요구가 우리의 노력으로 실행에 옮겨질 수 있는 행동의 영력이라고 판단한 나머지, 최선의 노력을 기우리려 한다면, 바로 그 순간 우리는 곧바로 깊은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된다. 주님께선 애당초 불순종의 행동으로 주님의 뜻을 떠난 인간에게 다시 행동을 요구하진 않으신다. 다만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순전한 믿음의 순종을 요구하신다.
주님께서 너희가 죽어야 산다고 말씀하신 것도 주님께서 ‘내가 죽어야 너희가 산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보내서 주님의 메시야 여부를 확인해 보는 과정에서도 주님께선 요한의 제자들에게 주님의 행동을 본대로 가서 말하라고 일러 보내셨다(눅7:22).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순종 외에 달리 무엇이 있을까? 온 우주만물을 지으신 행동의 창조주께서 사람을 불러서 함께 쉬게 하셨다. 하나님의 첫 안식에 동참해 쉬는 것부터 순종이었다.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한 것도 주님의 죽음을 따라 순종하며 살겠다는 뜻이다. 바울이 죽는다고 그의 죽음으로는 한 사람도 구원할 수 없다. 가룟 유다가 나무에 목을 매고 죽었다고 해서 그의 죄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것은 아니다. 그의 자살은 주님의 사랑과 용서를 거부한 오만이었다. 죽음을 앞둔 절망의 순간에도 십자가의 죽음을 짊어지신 주님의 뜻을 바르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했던 나의 죄인 됨을 깨달아야만 하나님께로 방향을 돌릴 회개가 가능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