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원목사와 함께 목회하는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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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월 30 일 새벽에 믿기지 않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전에 사역했던 동네에 일어난 참사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2001 년 9 월 11 일, 노회로 모인 식당에 들어서며 놀랬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때와 비슷한 충격이었습니다. 이 날 만이 아닙니다. 제 기억 속에 남겨진 큰 사고들이 여럿 있습니다. 와우 아파트가 무너졌고, 삼풍 아파트가 주저 앉아 있습니다. 이름도 모르는 탄광에 매몰된 사람들의 안타까운 소식은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옵니다. 꿈과 젊음이 함께 수장된 세월호의 그 많은 어린 생명들, 가난이 죄라며 노동현장에서 치열하게 살다 허무하게 죽은 사람들, 아무런 이유도 없이 길거리에서 생명을 잃은 사람들, 이념이 뭐라고, 그 때문에 전쟁터에서 숨진 꽃다운 젊은이들. 세상에는 좋은 일도 많지만, 없었으면 좋았을 가슴 아픈 일들이 참 많습니다.

 

이런 일들이 있을 때마다, 스스로 조심하는 몇 가지가 생겼습니다. 첫째, 무조건 ‘죄’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신학적으로 맞다는 말이, 관계적으로 그른 말이 됩니다. 함께 울고 함께 웃는 일이 먼저 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조심합니다. 둘째, 숫자에 의해 생명의 경중을 가리지 않습니다. 노동 현장, 지하철, 길거리, 양로원에서 외롭게 세상을 떠난 한 사람이나, 큰 사고나 질병으로 세상을 떠난 수백, 수천, 혹은 수백만의 생명은 동일하게 귀하며 아깝고 소중합니다. 사회와 여론이 다루는‘사건의 경중’은 있을 수는 있으나, ‘생명의 경중’은 각 사람이 동일하다는 것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셋째, 사건 사고를 접할 때마다, 당사자, 가족의 마음을 먼저 생각합니다. 모든 사건들은, 당사자와 가족에게 ‘옳고 그름의 문제’ 이전에 ‘살고 죽는 문제’입니다. 옳고 그름에 치우친 ‘관전평’이 아니라, 아픔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가족愛’가 필요합니다. 아픔은 아픔입니다. 감기 들어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그건 죽을병 아니야!’식으로 접근하면, [공감]은 도망가고, 멀어진 형식의 차가운 그림자만 남습니다. 십자가는 죄인 당사자 자리였고, 예수님은 그 자리에 대신 계셔 주셨습니다.

 

우리는 코로나로 550 만명 이상의 세계인을 보냈습니다. 작고 큰 일들이 계속 일어납니다. 세상 곳곳에 상처가 났습니다. ‘나는 괜찮다’고 할 일이 아닙니다. 사람 사이에 멍자국이 생겼고, 작은 일에 감정이 격해졌습니다. 집단치유, 상호치유가 필요하며, [동료치유]가 필요할 때입니다. ‘동료치유’는 평범한 우리가 일상에서 서로 치유합니다. 함께 겪고 있는 사람들이, 서로의 아픔과 시대를 이해해주는 치유입니다.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 어른과 아이 같은 관계, 높고 낮음의 관계가 아닙니다. 모두 동료 되고, 서로 친구 되어서 치유합니다. 치유의 기술이 있어서 아닙니다. 같은 시대에 같은 아픔을 들어주고 나누는 입, 귀, 마음이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세월호 엄마들이 모이고, 국군전사자 부모들이 모이며, 노동 현장에서 자녀 잃은 부모들이 모이면 특별한 말 없어도 가슴이 뚫린답니다. 시리고 아픈데 시원하답니다. 파괴적 관계가 난무하는 세상에, 치유적관계로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가까이 가면 나의 ‘깊은 상처: 외로움과 두려움’이 없어지는 사람, 그 사람이 우리 서로이면 좋겠습니다. 험한 세상에서 ‘상처 입은 치유자’이신 예수님을 깊이 닮으면 좋겠습니다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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