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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160): 삶과 쉼의 이어가기(4)
1. 믿음과 소망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 믿음은 우리가 소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입증해주는 도구이지만, 우리는 그 믿음을 바로 눈앞에 있는 것들을 긁어 모우는 갈퀴로 사용할 때가 너무 많다. 믿음이 있어서 소망이 생긴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소망을 가진 사람들에게 믿음은 언제나 바로 곁에 있다. 소망은 하나님의 진실하신 약속에 근거한 것이기에 오직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의 알파와 오메가는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를 땅에 보내주신다는 것이었다. 그 약속을 붙잡고 거기에 소망을 두고 살았던 사람들의 삶이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땅위에 오시기 전, 구약을 살던 믿음의 사람들이었다. 예수께서 땅위에 오심으로 그들의 믿음을 입증해 주셨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믿는 사람들이 곧 신약의 사람들이다(히11).
2. 진정한 축복
40년을 하루하루 일용할 양식을 받아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40년 치를 하루에 몽땅 받아서 푸짐하게 쌓아놓고 부자 된 마음으로 먹고 사는 것 중에서 어느 편이 참 축복일 것 같은가? 하나님께선 전자의 방법을, 그리고 사람들은 후자의 방법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지 않을까 싶다. 나는 로토를 한 번도 산 적이 없어서 잘 알지 못하지만, 큰 금액이 당첨된 사람들은 많은 세금을 제하고서라도 일시불로 받아서 그 부요함을 누리려 하지 않겠나 싶다. 어쨌든 누구든 자기 손에 거금을 만져보고 싶은 부풀어진 부한 마음이 있으니 말이다.
하나님께선 이스라엘의 광야 40년간을 하루도 빠짐없이 날마다 하루의 몫을 거둬서 하루하루 살도록 ‘하늘의 만나’를 하루하루 40년을 빠짐없이 공급하셨다. 물론 광야생활 중에 또 날마다 목적지를 향해 움직여야 하는 그들에게 그 방법 외에 달리 있을 수 없었겠지만, 하나님의 일용할 양식은 곡간을 늘려서라도 쌓아놓고 먹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하나님으로부터 공급 받아서 살아가기를 바라셨다. 단지 광야의 삶의 편의를 위해서가 아니기에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시면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내려주시고(마6:11)’라고 기도하게 하신 걸 봐서도 알 수 있다. 소위 천년만년 살 것처럼 재물을 쌓아놓아도,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라고 노래를 부르는 것과 일부로 맞출 필요는 없지만, 생명은 우리가 가진 것으로 보장되지 않기에,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내려주세요’라고 기도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합리적이라 믿는다. 일용할 양식을 잃는다면 겨우 하루치를 잃지만, 후자의 경우엔 40년의 몫을 쌓아놓았다가 한꺼번에 몽땅 잃어버릴 위험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한꺼번에 몽땅은 위험한 도박이 아닐까 싶다.
3. 하나님의 말씀에 누가 상처를 입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가 그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의 권위주의 때문에 상처를 입는다면,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을까? 만약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전하는 심부름꾼이 자신의 목에 힘을 주고 거만하게 처신한다면, 누가 상처를 받을까? 심부름을 보낸 하나님 아버지께서 비난을 받게 되고, 결국 하나님 아버지께서 상처를 입으신다. 하나님 아버지의 메시지의 핵심은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긍휼하심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것으로 멋지게 자선사업하시는 분이 아니라, 불쌍히 여기시는 긍휼하심이 마음의 전부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 각 개인에게 주신 긍휼의 말씀을 ‘나 몰라라.’하고 타인의 권위에 맡겨버리는 것은 겸손도 아니고, 아버지의 말씀을 받은 자녀로서의 도리도 아니다. 어쩌면 자녀라는 귀한 신분의 자진 포기이거나 권위주의 자에 대한 아부요, 하나님의 자녀라는 개인의 신분 자체가 희미해지면서 사라질 위험에 처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