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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344): 단상(斷想)으로 엮어 본 조각글 모음<2>
1. 새해 첫 주 예배 중 한 자매의 특별 찬양이 가슴을 울컥하게 만든 감동을 주었다. 까랑까랑한 한국 가락의 창에 복음의 진수를 담은 메시지가 예사롭지 않았다. 내 입으로 따라 부를 수 없으니 더더욱 가슴 속 깊이 파고들었는지 모른다. 몇 년 만에 가족들과 함께 성탄절을 보내려고 방글라데시에서 방문한 아들과 함께 드리는 예배인 탓인지 특별 찬양이 가슴속에 더욱 깊이 다가왔다. 아들도 예배 후에 특별 찬양이 아주 좋았다고 말했다. 낯선 외국에서 20여년을 보내고 있으니 한국의 창 문화가 더욱 새롭게 들렸는지 모른다.
나는 마침 창세기 3장에 기록된 선악과에 대해 묵상 중이었기에 ‘그대가 나에게 선하게 대하므로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대가 악하게 대하므로 나쁜 것이 아닙니다.’라는 창의 가사를 누구라도 반복해서 익혀 익숙해지면 선악의 지식은 각 사람의 자기 좋은 대로가 아니라, 하나님 한 분만의 절대주권 선언문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안목으로 사물을 바라볼 수 있을 거란 생각을 더욱 다짐하게 되었다.
그렇다. 성경을 읽으며 잘 이해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없을 땐, 나는 늘 창세기로 되돌아가고 있다. 마침 금년 교회의 표어가 ‘창조주 하나님(창1:1)!’이고, 그 찬양의 제목이 ‘그대가 나에게’였으니 너와 나 우리 모두가 창조주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 그분의 뜻을 헤아리며 ‘그대가 나에게’ 어떤 분인지 순간마다 헤아리며 살았으면 좋겠다.
2. 육체를 지니고 시간 속에서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각자의 그 어떤 계획이든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돼 있고, 일상도 시간으로 구분해 살아간다. 그래서일까? 하루에도 몇 번씩 달력을 살펴보고, 시간에 쫓기는 것도 아닌데, 손목에 찬 시계든 벽시계든 자주 살피며 두리번거리는 게 상식적인 일상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라서 그분의 계획은 시간으로 쪼개져 있지 않다. 물론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을 수행하시는 그분의 뜻과 역사가 시간 속에 들어오면, 조각조각 나눠진 것처럼 보이는 것은 맞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 속의 다양한 역사가 녹아있어서 과거처럼 보일지라도 그 역사를 살피며 하나님의 현재적인 뜻을 헤아리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은 결국 시간 속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모두 담고도 남을 만큼 영원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의 모든 계획과 일들을 시간 속에서만 바라보면, 거기서 영원을 잃고 시간에 갇힌 다양한 고통을 겪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3. 창조주와 피조물의 선후는 전혀 바뀔 수 없는 하나님의 선한 질서, 곧 생명질서이다. 선악의 선후관계도 이와 같다. 선재(先在)하는 ‘좋다’는 선(善)이 뒤에 나타난 악(惡)을 고치거나 다스릴 수가 있지만, 악은 앞에 있는 선(善)으로 되돌아가지 않는 한 악의 다양한 모습을 벗어날 수 없다. 생명과 죽음의 선후관계도 이와 같다. 생명이 죽음을 되살릴 수는 있지만, 후자인 죽음이 선재(先在)하는 생명을 좌우지 할 수 없다. 죽음은 결코 저절로 혹은 자의로 살아날 수가 없다. 다만 부활로 생명이 죽음을 살릴 수 있다.
온 우주 어디에도 죽음이 존재하지 않을 때, 죽음을 최초로 언급하신 분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창조주의 죽음의 경고를 최초로 들은 자는 창조의 맨 마지막에 지음 받은 사람, 곧 아담이다. 죽음은 곧 생명을 잃는 것이고, 동시에 낙원을 잃는 것이다. 에덴의 동편은 곧 죽은 자들의 무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