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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361): 그리스도께 죄인의 신분노출로 얻은 구원
우리 크리스천들은, 아니 주님을 믿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인 교회는 각자가 주님을 만나고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발견한 사람들이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크리스천의 정체성은 한 마디로 죄인이란 신분이다. 곧 누구든 크리스천이라면 자신이 죄인이라는 신분을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아주 당연하게 주님과 사람들 앞에 이미 드러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바울처럼 ‘나는 죄인 중에 괴수이다’란 고백에서 보듯 변명의 여지가 없이 그가 죄인이란 사실을 선언했다. 그러나 죄인이란 고백을 겸손이란 말로 포장하지 않아야 한다. 죄인은 그 이하로 내려갈 자리가 없는 신분이기에 죄인이란 고백이 자신을 낮추는 도덕적 겸손일 수 없다. 죄인에게 겸손이란 도덕성을 부여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란 신분을 보기 좋게 포장하는 일은 위선의 행위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크리스천의 신분 표시는 그저 죄인일 뿐이다. 죄인이란 고백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진실일 뿐, 겸손이 될 수 없다.
베드로는 주님을 따르면서도 자신이 주님의 죽음으로 용서 받아야 할 죄인이란 신분을 잊고 주님의 죽음을 막으려 했을 때, 주님으로부터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마16:23)’는 호된 질책을 받았고, 그의 언행이 ‘하나님의 일보다는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위선적인 거짓 행위였기에 사탄이란 질책을 받았던 것. 자신이 구원 받아야 할, 혹은 구원 받은 죄인임을 잊게 될 때 그것이 위선이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 불쌍한 죄인이지만, 주님으로 인하여 받은 구원의 행복을 자신의 삶으로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갈릴리에서 죽음의 행로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던 그리스도께서 한 죄인을 구원하러 유대인들이 멸시하던 여리고 성을 방문하셨던 일은 단순히 지나가는 길이 아니었다. 한 사람의 죄인의 생명을 구원하시려는 복음의 행로였다. 복음 앞에 설 수 있는 자는 누구라도 죄인임을 고백하는 자이다. 자신의 죄가 아닌 다른 것을 자랑하는 사람은 주님을 만나기 힘들다. 단순히 한두 가지의 죄를 고백하고 후련한 듯 멀리 서있다고 해서 주님을 만날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사람에게보다는 하나님 앞에 죄인이란 자기 고백이 있어야 한다. 사람들 사이에서의 죄인으로 손가락질을 당하는 것으로는 주님을 만날 수 없다. 오직 주님께 자신이 죄인이란 신분을 드러내 용서를 받고, 그 이후의 삶은 하나님의 긍휼로 살아가겠다는 개인적인 다짐으로 주님을 믿고 받아들여야만 구원받아 그분을 만날 수 있다. 당시의 삭개오는 세리로서 누구에게든 잘 알려진 죄인이었다. 그의 부(富)가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서 신분상 죄인의 증표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의 죄인이란 평판을 듣고 삭개오를 찾으신 게 아니었다. 삭개오가 주님을 자기 집으로 초대한 것이 아니라, 삭개오의 집으로 주님께서 그를 초대하셨다. 어느 바리새인의 초대도 받으시고, 그 집을 방문하신 적이 있었지만, 주님께선 뽕나무에서 삭개오를 불러 내리시고, 삭개오를 그의 집으로 초대하신 것은 주님이셨다. 바리새인은 자기 의를 드러내려고 주님을 초대했는지 모르지만, 삭개오는 감히 자기 집으로 주님을 초대할 수 없는 죄인이었고, 그가 나무로 올라간 것 자체가 자신의 약점과 죄인이란 신분을 주님과 많은 사람들에게 의지적으로 노출시켜 긍휼을 바랐기에 천국을 바라는 어린아이로 긍휼의 초대를 받은 거였다(눅19: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