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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281): 과거와 현재
나는 내가 필요해서 시계를 산 적이 없다. 누구에게서 선물로 받은 손목시계를 차고 있긴 하나 그 시계를 보면서 시간을 점검하는 일은 거의 없다. 아내와 같이 걸으면서도 문득 아내에게 몇 시냐고 묻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내가 손목시계를 차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을 때가 있다는 뜻이다. 초침이 돌아가고 있지만, 그것은 내가 찬 시계가 죽지 않고 있다는 걸 알려주는 것 외엔 내게 별로 의미가 없다. 100미터 달리기에서 초침을 계산할 나이가 지났기 때문일 수도 있다. 또 나는 분초를 나누어 살아가지 않기 때문에 분침도 별로 소용이 없는 것 같고, 시간에 맞춰 어디에 출근하는 것도 아니고, 날마다 제 시간에 맞춰 무슨 일을 하는 것도 아니기에 시침도 별로 소용없으니 결국 내겐 시계가 필요치 않은 것 같다. 시계가 없는 것처럼 살고 있으니 아주 편한 사람이라고 지레 짐작할 사람들도 있을 법하다.
그렇다고 내가 찬 시계가 과거의 나를 알게 해주거나 과거의 아픔을 씻어주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미래를 위해선 그 어떤 지침도 없고, 현재를 알려주어 나를 압박하는 일도 없으니 결국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시계를 습관처럼 차고 있는 셈이 아닌가? 누가 명품 시계를 찼다고 해서 그의 시간이 명품일 수도 없지 않은가? 나는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를 슬쩍슬쩍 눈치 보듯 점검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시계를 건성으로 보기 때문에 방금 본 정확한 시간을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 사실은 나 역시 시계를 차고는 있지만, 어느 시간에 꼭꼭 맞춰서 살아가는 사람은 아니다. 그런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지 의문이 드는데, 과연 시간은 우리에게 무엇일까란 의문이 뒤따른다. 간혹 내가 과거를 헤아리는 것은 현재 내가 존재하기 때문인데, 그래서 내겐 영원과 상통하는 오늘을 아름답게 살고 싶을 뿐, 오늘과 관계없는 먼 미래를 위한 꿈은 없다. 나는 나의 생애 80년을 넘긴 채 살아오면서도 내가 기억하고 있는 꿈이 한 가지도 없다. 그저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덜 끼치고 살고 싶을 뿐이다. 현재가 과거에 의해서 계속해서 영향을 받는다면, 물론 좋든 싫든 영향을 받겠지만, 특히 과거의 아픔이 오늘에도 영향을 준다면, 결국 과거에 붙잡혀 살아가는 것일 뿐, 현재도 미래도 모두 과거의 영향 아래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는 걸 기억했으면 좋겠다.
시간과 영원은 그 존재 자체가 다르다. 시간은 피조물(창1:5), 영원은 시간을 지으신 하나님 한 분만의 속성이다. 주님께서도 ‘나는 알파와 오메가이다.’라고 밝히셨다. 알파 이전과 오메가 이후에 아무 것도 없고, 다만 하나님 한 분만이 영원한 분이란 뜻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곧 영원이다.’라는 선언이다. 그리스도 안에 산다는 것은 결국 나도 영원을 산다는 것이니 시간의 지배를 이미 벗어난 존재임을 자각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물론 육체의 삶이 아니라, 영적 생명의 삶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선 영원하신 하나님으로 육체를 입고 시간 속에 오셨다가 또 영원으로 복귀하신 것이 죽음에서의 부활이고, 부활 이후의 승천이다. 하지만, 영원하신 주님께서도 재림의 시기에 대해선 모른다고 말씀하시며 오직 아버지만 ‘그 날과 그 시각’을 아신다고 밝히신 걸 보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과 그 시각은 전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소관이란 뜻이다. 우리처럼 육체로 시간을 옷 입고 땅에 계실 적엔 모른다고 말씀하신 것이 정상이 아니겠는가? 우리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로 하나님의 영생을 살고 있더라도 육신으로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선 장래의 일, 아니 일분일초 이후의 일조차 알 수 없는 것이 정상이 아닌가?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각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 ...홍수가 나서 그들을 모두 휩쓸어 가기까지, 그들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하였다. 인자가 올 때도 그러 할 것이다(마24:36-40).”
그렇다. 영원은 시간 속에서 오직 믿음으로 살아갈 때, 그 믿음의 끝에서 온전히 알 수가 있다. 이미 죽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언급하시며 ‘나는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하신 하나님의 선언이 영원히 유효하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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