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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173): 죽어야 사는 것, 이것이 복음이다!(2)
복음을 믿는 우리에게 복음에 관한 오해가 많다. 그 실상이 무엇일까? 그 중 한 가지만을 지적한다면, 복음으로 내가 세상에서 성공하고, 무엇이든 잘 풀리리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는 경향이 아닐까 싶다. 내가 세상에서 성공하고 잘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그 자체가 바로 내가 내 복음의 주인행세라는 걸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보다 큰 문제이다.
주님 앞에서 내가 죽는다는 건 나의 소유의 모든 것이 사라져버림과 동시적이고, 결국 주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모든 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주님을 따르는 것으로 마무리되기를 바라셨지만, 그 청년은 세상에서 이룬 것을 떠나보내지 못하고, 주님에게서 돌아선 것이 주님과의 결별이었고, 또한 복음과의 결별로 그는 당분간 재물의 부자의 신분을 유지할 수는 있어도 결국 하나님과의 영적 단절로 실상은 죽은 자로 그의 마지막이 최악의 가난이라는 걸 깨닫지 못했다. 지금까지 자기를 채우고 그것을 의지해서 살아가는 수단들을 비우지 않으면 그의 영은 그리스도로 채워질 수 없고, 그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채워지는 것만이 곧 복음이 주는 새로운 생명의 은혜라는 걸 실감할 수조차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주님의 뜻을 알아차리고 ‘저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좇았다.’고 자랑스레 고백했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또 주님께서 그런 요구를 당연시 하셨다.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너와 나 우리가 가진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겠다는 다짐이 곧 모든 것을 버리고 대신 복음을 짊어지고, 주님만을 따르는 제자들의 삶이었으니까 말이다.
72명의 제자들을 두 사람씩 짝지어 복음을 전하러 보내실 때도 주님께선 그들에게 만반의 준비를 명하지 않으시고, 어디를 가든 주님의 보냄을 받은 전도자들을 받아들이는 어떤 사람들의 집에 머물며 그들로부터 얻어먹으며 일하도록 명하셨다. 아마도 인간 지도자가 그렇게 명령했다면, 제자들 중 누구도 그 명령을 따라 전도를 시작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주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모든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주님을 따르도록 하신 이유를 깊이 묵상해야 한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짐 진다는 뜻이다. 복음의 무게는 어쩌면 주님께서 지셨던 십자가만큼이나 무겁고 힘든 것인지 모른다. 그런 전도자들은 한 마디로 떳떳한 거지 전도자들이었고, 그들은 복음 외에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자들이기에 그들을 돕는 것은 예수 그리스를 믿고 따르는 자들로 그들의 소유가 자신의 것이 아니라, 곧 하나님의 소유라 믿는 자들이기에 그들로 하여금 가난한 복음 전도자들을 돕는 자가 어디든 있다, 혹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전제하신 말씀이었다. 복음을 전하는 자나 그들을 돕는 자들이나 모두 복음으로 하나 된 한 몸의 한 무리들이기 때문이다. 누가 누구에게 신세를 진 것은 결코 아니다. 얻어먹는 자든, 그들을 돕는 자든, 양측은 모두 주님의 복음에 빚진 자들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따라서 주님을 따라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는 복음, 곧 그리스도 외에 세상에서 가진 것이 없는 자여야 하고, 혹시 빌레몬처럼 집에 노예까지 두었던 재물이 있는 자라도 영적으로 가난한 자여야 한다. 그런 가난한 자를 돕는 자들 역시 천국 백성으로 가난한 자들 중에 한 사람 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영생을 얻으려고 찾아온 부자 청년에게 전하신 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시다.
우리 주님의 뜻과는 다르게 오늘의 교회가 재정적으로 부(富)하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교회의 물질적 부가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그래야 복음을 잘 전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교회에 쌓아둔 재물의 부(富)는 과연 무엇을 위한 부(富)일까? 내가 부자인가, 가난한 자인지, 내가 판단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내가 하나님께 속한 자인지 아닌 지의 여부는 하나님께서 판단하시기에 부자라는 신분에 초점을 맞추느냐, 가난한 자의 신분에 초점을 맞추느냐, 이것이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