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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262): 상식과 신앙 사이(2)
‘살아 있는 어느 누구도 주님 앞에서는 의롭지 못하니, 주님의 종을 심판하지 말아 주십시오(시143:2).’ 다윗이 이렇게 노래로 호소하는 이유가 어디 있다고 생각하는가?
바울의 마음도 겸하여 어떠한지를 살펴보기를 원한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않는 상태에 가두신 것은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는 것입니다(롬11:32).’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에 못 미치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롬3:23).’
‘인간은 원래 선천적으로 선하다.’ 아마도 앞의 표어처럼 보이는 말은 듣기 좋은 성선설인 반면, 그와 다른 성악설도 존재하는 걸 알고 있기에 인간은 선과 악으로 오락가락 하면서도, 인간은 원래 선천적으로 선하지만, 하수상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할 수 없이 악을 저지를 때가 있다고 변명하는 것, 이것이 곧 상식적 사고이다. 그러나 상식은 상식일 뿐, 신앙은 아니다. 신앙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거나 하나님께 머물러있지 않고, 각자 자신의 상식에 머물러 있으면, 오늘 옳고 좋았던 것이 내일이면 안 좋은 것, 곧 악이 되고 날마다 순간마다 변하면서 아주 편안한 자신의 상식이 돼버린다. 결국 상식은 사람에게서 나오고 사람들 속에서 회자된다. ‘주님 앞에서 의롭지 못한’ 사람의 입에서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것은 상식이다. 바울의 말처럼 죄인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언행이 모두 상식이요 상식적이다. 하지만, 신앙은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하나님의 선물이요,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서 나오는 상식으로 하나님의 선물인 신앙을 망가뜨리는 일이 너무나 많다.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우리의 상식으로 이해될 수 있는 어휘나 구절이 하나도 없다 해도 과장이 아니다. 주님께서 주신 믿음의 눈으로 보지 않으면, 모두가 하나님의 인격이 송두리째 빠진 신화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존재를 신화로 만들어 마치 자신들의 상식으로 덮어버린다.
물론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은 모두 하나님의 눈에 선하게 지음 받았다. 하루하루 창조사역을 끝내실 때마다 하나님께서 ‘좋다.’, 곧 선하다고 선언하셨다.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이 선과 악 사이에서 시계추처럼 춤을 추고 있는 것은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떠나면서 하나님께 불순종의 죄악으로 습득한 선악의 지식이 그의 상식선에서 정함이 없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기 때문에 항상 정확치 못한 상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진정 우리가 믿고 받아들여야 할 신앙은 무엇인가? 자기중심적인 상식을 벗어나려면,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과 그 뜻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려면 개개인의 상식을 벗어나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 각자의 실상을 깨닫는 것이다. ‘살아 있는 어느 누구도 주님 앞에서 의롭지 못하니’라는 다윗의 고백을 먼저 받아들여 자신도 함께 고백하고, ‘주님의 종을 심판하지 말아 주십시오.’라는 은혜를 바라는 것이 하나님 중심의 신앙이다.
바울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않은 상태에 가두신 것은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는 것입니다.’라고 고백한 것도 사람이 스스로 의로운 척 해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순종치 않은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자백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비를 받는 지름길이라 말한 것임을 기억하자.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곧 하나님께서 주신 신앙이란 뜻이다.
창세기 3장엔 하나님께서 인간을 타락시킨 뱀과 여자와 남자를 각각 책망하신 사실이 기록돼 있다. 여자와 남자의 순으로 하나님께선 책임을 물으셨다. 남자와 여자의 순으로 하나님께선 창조하셨지만, 하나님께 불순종한 죄는 여자와 남자의 순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여자와 남자, 그들은 동일하게 잘못의 고백이 아니라, 남을 향한 핑계였다. 그렇다. 인간의 핑계는 잘못을 저지른 자들의 상식이다. 핑계는 죄를 피하거나 사라지게 할 수 없다. 뱀에겐 거짓된 유혹에 대해 이유를 묻지 않으시고, 하나님께서 저주하셨지만, 결국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치명타를 입게 놔두셨다.